전화는 음성이나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어 전송로를 통해 먼 곳까지 보내고 다시 소리로 변환시켜 소통하게 하는 통신 기기이다. 전화 시스템은 1876년 벨(Bell, A. G)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경 경운궁을 중심으로 중앙부서를 연결하는 전화선과 서울과 개항장 인천 사이에 전화선 가설이 완료되어 공무용으로 이용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음성뿐만 아니라 사진, 동영상의 송수신뿐만 아니라 국제간 실시간 화상 통화가 가능해졌다. 최근 무선 이동통신의 발달로 유선전화의 사용은 감소하고 있다.
모스(S. F. B Morse)가 전기 신호를 이용한 소통 방식을 발명한 이래 전신기의 개량뿐만 아니라 음성 정보 전달을 위한 통신 기기, 즉 전화의 발명이 가속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음성뿐만 아니라 사진, 동영상의 송수신뿐만 아니라 국제간 실시간 화상 통화가 가능해졌다.
모스 전신, 즉 모든 낱글자와 숫자를 점과 선의 전기신호로 전환하는 모스체계는 매우 혁신적인 통신방식이었지만, 문제점이 없지 않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기선에 송수신기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고, 모스부호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숙련자에 의존해야만 정보 교류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런 사용 제한을 해소하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개량과 발명이 이어졌다. 전화 역시 이런 노력들의 산물이다.
전화의 영어표현인 텔레폰은 그리스어로 먼 곳을 의미하는 텔(tel)과 소리를 의미하는 폰(phone)의 합성어로, 1846년 영국에서 나팔모양의 확성기에 압축 공기를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일종의 기적(汽笛) 장치 발명품에 명명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발명품은 비록 떨어진 곳에 음성을 전할 수는 있었지만 전기를 이용하지는 않아 엄밀하게 현재 사용하는 전화와는 다르다.
전화시스템은 1876년 벨(Bell, A. G)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당시 전신관련 발명가로서 큰 명성을 가졌던 그레이(Gray. E)도 거의 동시에 같은 성과를 냈다. 그레이는 처음으로 소리를 전류로 바꾸는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를 이용해 바이올린의 음을 전기적으로 바꾸는 금속진동판의 전자기수신기를 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음악전신기, 다중전신, 음성전신 등에 이 금속진동판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통신회사들은 이 발명품들을 ‘장난감’보다는 하나의 전신선으로 동시에 여러 모스신호를 보내는 다중전신개량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고, 그는 통신회사의 요구에 주목했다.
벨 역시 비슷한 시기에 독립적으로 음성 통신 기기를 개발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농아 발성법, 음성학이었다. 기계적 발명에는 문외한이었던 벨은 기계수리공이며 모형 제작자였던 왓슨(Watson. T. A)에게 의뢰해 음성을 전기적으로 전달할 때 필요한 기구를 제작했다. 다중전신개량에 매진한 그레이와 달리 벨은 전화방식 개발에 집중했다. 전화의 개량과 실용화에도 기여해 성공을 거둔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음성학과 농아교육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전화 실용화는 보스턴-뉴욕구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전화교환방식은 자석식으로 수화기를 걸어놓고 핸들을 돌려 전화교환수를 호출하고, 상대방의 번호를 교환수에게 알려주어 연결하게 함으로써 통화가 가능했다. 1878년에는 에디슨(Edison. T. A)이 탄소 저항을 이용해 송화기를 개량함으로써 통화 품질 개선에 기여했으며, 1889년에는 스트로저(Strowger. A.)는 자동식 교환기를 발명했고, 1896년에는 다이얼 전화기가 발명되었다. 그리고 1958년 미국 벨연구소에서 전자교환기가 개발되었다. 교환방식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자 전화기 역시 다이얼식에서 전전자식 버튼식 전화기로 전환되었다.
미국에서 발명 · 진화된 전화 실물이 조선에 도입된 것은 1882년 3월 22일(음)이다. 1881년 청나라 텐진 무기공장에 근대 무기기술 습득을 위해 파견된 군계학조단 상운(尙澐)이 조기 귀국하면서 전상(電箱 → 電信機) · 덕률풍(德律風 ← telephone의 음역)이라고 일컫던 전어통(傳語筒 → 電話機) 등 21종의 전기 통신기기를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 때에 들여온 전화기의 사용 여부는 이후 벌어진 임오군란 등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1894년 전후 조선정부는 이 통신기기를 중앙정부 내 문서 수발을 일부 대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다. 1893년 11월 27일(음)과 1894년 1월 16일(음) 등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새롭게 도입하여 인천항에 도착한 행정용 전화기와 부속물에 대한 면세조치를 총해관(總海關)의 총세무사(總稅務司)에게 요청한 기록이 있고, 1894년 2월 30일(음) 화전국에서 전화기 실험을 명일(3월 1일)하겠다고 통보한 기록이 있다. 1895년 3월 25일(음)에는 드디어 전화(우체, 전신 등 포함) 관련 사무를 관할하는 부서로 농상공부 소속의 ‘통신국’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1894년과 1895년 궐내 전화 사용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 이 또한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1894년 이래 청일전쟁 · 갑오개혁 · 을미개혁 · 을미사변 등 불안한 정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896년 즈음, 경운궁(현재 덕수궁)을 중심으로 중앙부서를 연결하는 전화선과 더불어 서울과 조선의 대표적 개항장 인천 사이에 전화선 가설이 완료되어 공무용으로 이용되었다. 이 전화선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부서로 궁내부 소속의 통신사가 설치되었다. 백범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그 집행일자를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을 때 고종이 “사형을 정지하라”는 칙명을 전화로 인천감리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민간 전화는 1902년 인천 해관과 서울에 전화소가 설립됨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 사업은 통신원 관할이었다. 통신원은 1900년 전화 · 우체 · 전신을 포함한 선박 운용 등 정보소통을 위해 필요한 업무들을 총괄하기 위해 설치한 정부 부처였다. 전화 · 우체 · 전신 사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통신원 산하에 서무국 체신과를 두었으며, 전문 전신기사를 양성하기 위한 체계를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기통신사업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법제적 · 제도적 장치도 정비했다. 그 결과 대한제국의 통신사업은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으며, 이런 발전을 바탕으로 민간 전화사업도 추진할 수 있었다.
1902년 3월 20일 한성전화소와 인천전화소가 개설되자 이날 통신원총판 명의로 전화소에서의 통화요금과 통화시간 등에 대한 규정을 담은 ‘경인간전화(京仁間電話)에 관한 규칙’을 한문과 영문으로 작성하여 공포하였다. 이어서 1902년 4월 24일 통신원의 전화사업 정착과 지원을 위해 칙령 제5호로 전문 30조와 부칙 1조로 이루어진 『전화규칙』을 공포하였다. 이 『전화규칙』에 의하면 이를 따르지 않는 전화선은 불법이었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허락 없이 일본이 추진했던 전화사업을 겨냥한 것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일본이 서울에 임의로 설치한 전화선을 철거하기도 했다. 또 1902년 4월 24일 칙령 제6호로 전보사관제를 개정하여 전화선 구역내에 위치한 전보사에서는 전보업무뿐만 아니라 전화업무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전화선 관리 등 전화운용에 필요한 업무를 지원하기 위한 조치였다.
민간 전화사업이 시작된 초년에는 전화 가입이 4건(한성 2, 인천 2)에 지나지 않았으나, 1905년에는 80건(한성 50, 인천 28, 수원 1, 시흥 1)으로 늘어났다. 지방의 경우, 외국인이 운영하는 기업이나 외국인 조계내의 외국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서울의 경우에는 가정집에 설치한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인가입자(청원인)의 전화기 설치 사용료는 매년 100원(6개월마다 2회 분납)으로 매우 비쌌다. 그리고 전화소를 방문해 사용하는 전화요금은 매 5분마다 50전을 내야만 했고, 통화시간도 대기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10분을 넘길 수가 없었다.
당시에 전화소에서는 다른 전화소와의 통화가 가능했고, 전화소와 개인가입자 및 개인가입자 상호간의 통화도 가능했다. 또한 전화소에는 장리(掌吏)라는 관리자가 있어 전화요금을 받거나 통화시간을 제한하였고 통화 중에 저속한 언사를 사용하거나 언쟁을 벌이면 통화를 중지시킬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전화소 전화기’는 현대의 공중전화기와 같은 역할을 하되 관리자의 직접적 간섭이 따랐던 셈이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통신원이 계획했던 전화사업의 확장은 좌절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서울 평양간 전화선을 강점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에는 강제로 한일통신기관협정을 체결하게 해 대한제국 정부의 전신전화선을 포함한 모든 통신 수단을 피탈했다. 이후 조선 식민지 구축을 위한 통감부의 통신도구가 되었다.
1905년 이른바 한일통신기관협정 이후 전화사업은 조선내 일본인 사업체와 통감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기존 대한제국 정부의 모든 통신망과 통신시설, 통신전문인력을 장악한 통감부는 특히 전신, 전화 전문인력을 통신사업에서 배제하는 한편 인수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된 1906년, ‘한일통신기관협정’에 통신원 존속이 명기되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폐지했다.
일제강점기, 전화사업은 겉으로 보기에는 양적 질적으로 발전한 듯했다. 인천, 서울, 평양에 머물던 전화선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자동전화교환기술도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전화선은 일본-조선- 만주 연결에 초점을 맞추거나 반일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한 경비통신에 치중된 것이어서 한반도를 아우르지 못했다. 도입된 자동전화교환기는 개발된 지 30여 년이 지난 것으로 그나마 경성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다.
1930년대 이룬 양적 성장은 중일전쟁, 대동아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북조선 지역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그나마 이 시기 전화선 대부분은 일본인에게 공급된 것이었다. 조선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했던 일본인이 전화 가입자의 80%에 이를 정도였다. 무엇보다 고급 통신기술자 양성에서 조선인을 배제해 광복 후 일본인이 버리고 간 전화설비를 사용할 수 없게 했다. 이들 50% 이상 고장난 설비를 보수, 정비할 인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광복으로 전화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하지만 전기통신은 기본적으로 전신선을 가설해야 하는 설비산업인데, 남북분단과 6.25 전쟁으로 전신선 가설을 위한 기본적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고, 그나마 가설되었던 전신선마저 파괴, 훼손되었다. 기자재와 기술 부족 상황은 휴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과 더불어 통신 분야의 발전은 괄목할 만했다. 통신 관련 차관 도입 규모도 커졌다. 그럼에도 만족할 만한 전화선 공급은 이루어지지 않아 전화 적체가 사회적 문제를 초래했다. 이는 경제가 급격하게 팽창한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심각해졌다. 이 부족 현상은 전화사용권 매매가 가능한 이른바 백색 전화값의 폭등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전화공급 부족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전화선을 대중이 동시에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교환기의 도입 및 개발, 지역단위의 교환기 설치, 자동장거리 전화의 설치와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전화수급의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런 전화선 부족에 대한 사회적 불만은 새로운 방식으로의 전환, 즉 전자식으로의 교환 방식 전환, 광통신선의 개발 및 광통신망의 구축 등을 위한 연구와 기반 조성을 위한 투자의 배경이 되었다. 연구와 투자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1977년 설립된 한국통신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연인원 1,060여 명의 연구진이 투입돼 진행된 전자교환기의 개발이었다. 1984년 개발된 이 TDX-1은 전세계적으로 10번째의 성공이었다. 이의 상용화와 개량으로 전화적체 현상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현대 한국의 전화기술의 발전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정보산업의 선두가 되기 위한 시설투자와 연구기반과 필요 장치 및 자재 생산을 위한 산업시설도 구축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무선통신의 상용화를 위한 준비였다. 1980년대 무선통신은 통신보안의 취약성으로 활용이 미미했다. 1980년대 초 무선호출서비스, 일명 삐삐의 등장, 차량이동전화서비스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관련 기업들의 참여가 시작되었다. 사용하는 전화기에도 무선방식이 도입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일반 대중이 이용하는 이동통신이 등장했다. 개인휴대전화, 휴대폰 등으로 일컬어지는 이 전화방식은 이동통신서비스 지역 안에서 무선구역 안의 기지국을 통해 일반 전화가입자나 다른 이동통신 전화가입자간 통화가 가능한 전화방식을 총칭한다. 우리나라는 코드분할다중 접속(CDMA)방식을 채택해 개발함으로써 1997년 10월 1일 이래 상용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이동통신으로 음성, 문자, 동영상까지 주고받을 수 있다. 현재는 4세대 휴대폰 시대로 단말기를 이용해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 정보 수취의 공간적 제약을 벗어나게 되었다.
전화는 전화기 본체(전화단말기) · 전화회선 · 교환기가 중요 구조를 이루며, 과금장치가 있어 전화요금 징수에 필요한 자료로 쓰인다.
전화회선은 전화기로부터 교환기가 있는 전화국까지의 시내회선과 전화국을 연결하는 시외회선으로 구분하고 그에 따라 통화요금도 차별을 두었지만, 현재는 전국 단일통화요금을 적용하고 있다. 과거에는 또한 구리선 두 쌍을 수 십 개 묶은 케이블이 회선으로 이용되었지만, 현재는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석영계 유리를 원료로 한 광케이블이 이용된다.
교환기의 발전도 괄목할 만하고, 전화기 본체의 변화도 그에 못지 않았다. 초기 전화기는 송수화기가 분리되어 있어, 통화를 원하면 수화기를 걸고 전화기 본체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돌려야 교환대에 접속할 수 있었다. 이제는 송수화기 일체형으로 바뀌었다.
전화국에서 지급하는 전화만을 이용해야 했던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에 들면서 전화기가 다양해졌다. 다이얼이 달려 있는 검정색 전화기가 색색의 다양한 모양으로 바뀌었고, 전자식(버튼식) 전화기도 등장했다. 그리고 무선전화기(Cordless phone)도 선보였다. 초기 무선전화기는 통화권이 집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통화하면서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각광을 받았다.
서류가방 만한 차량 이동전화도 등장했다. 이 차량 이동수단은 유지하기 쉽지 않고 수송 용량도 크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차안에서 통화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제공했다. 전화기 모양은 휴대폰의 등장에 따라 더욱 더 다양해졌다.
전화기는 교환방식에 따라 자석식전화기 · 공전식전화기 · 자동식전화기 · 전자식전화기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자석식전화기와 공전식전화기는 교환수가 교환대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상대방을 연결해 주는 방식이고, 자동식전화기와 전자식전화기는 전화기의 전화번호를 돌리거나 누르면 교환기가 상대방을 자동으로 연결해 주는 방식이다. 자동식전화기는 숫자판의 다이얼을 회전시킨다고 하여 다이얼식전화기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널리 사용하고 있는 전자식전화기는 단추와 같은 판의 숫자를 누른다고하여 버튼식전화기라 부르기도 한다.
또 전화기를 형태에 따라 구분하면 탁상형 전화기(Table Phone), 벽걸이형 전화기(Wall Phone), 촛대형 전화기(Candlestick Phone)로 나눌 수 있다. 탁상형전화기는 책상 위에 안정적으로 놓인 형상에 따라, 벽걸이형 전화기는 벽면에 매달려 있는 형상에 따라, 촛대형 전화기는 촛대와 같이 뾰족한 형상에 따라 명명하였다.
1996년 이후 유선전화 총 통화량은 매년 10.8%씩 감소하고 있으며 이미 1999년부터 매출액 부분에서도 이동통신이 유선통신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KT는 지난 2002년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2014년에는 유선전화간(LL: Land to Land) 통화가 사라진다”는 전망을 내놓았고, 주력 서비스업종인 ‘유선전화 퇴출’을 공식화한 바 있다. 그러나 비록 휴대전화 가입자 증가에 따라 가정에 가설되는 유선전화가 크게 감소 추세를 보이고 또 그 통화량에서 더욱 뚜렷하게 감소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공기관이나 회사 · 사업장 등에서는 여전히 유선전화가 중요한 통신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