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군영은 조선 후기, 수도 및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다섯 군영이다. 훈련도감은 정병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되었고, 어영청은 인조반정으로 인한 국내 정세와 후금의 공격 등 국외 정세를 배경으로 설치되었다. 금위영은 병조에 직속되어 있던 정초군과 훈련도감의 훈련별대를 합쳐 설치되었다. 총융청은 경기도 일대의 방어를 위해 도내의 정군·속오군 및 별마대군으로 조직되었다. 수어청은 수도 외곽의 방어선이 될 수 있는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남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중앙군의 핵심은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이며 총융청·수어청은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군영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군영들로서 훈련도감(訓鍊都監) · 어영청(御營廳) · 금위영(禁衛營)은 수도를 직접 방어하는 중앙군영이며, 총융청(摠戎廳) · 수어청(守禦廳)은 수도 외곽의 방어를 담당했는데 이를 오군영이라 하였다.
후기 중앙군의 선구는 훈련도감으로, 1593년(선조 26) 10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유성룡(柳成龍)의 강력한 건의에 의해 설치되었다. 당시 서울 수복 후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정병을 양성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고 국가에서 급료를 지불하도록 했는데, 그 이름을 훈련도감이라 하였다.
그 편제는 명나라 장군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해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하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 조직의 핵심은 대개 125∼127명으로 편제되는 초에 두었는데, 이 초 단위의 병종은 삼수병(三手兵)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삼수량(三手糧)을 거두어 운용 경비에 충당하였다. ‘도감’이라는 명칭이 말해 주듯이 처음에는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삼수병을 훈련하고 양성하는 임시 군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필요에 의해 계속 존속하면서 허구화된 오위를 대신해 후기 중앙군의 핵심군대로 자리를 잡아갔으며, 그 수는 대개 5,000명이었다. 편제는 이 뒤에 설치되는 모든 군영 조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병종의 편제도 위의 삼수병 편제를 따르게 되었다.
어영청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인해 어수선한 국내 정세와 대후금 강경책의 표방으로 인한 각종 압력 등의 국제 정세를 배경으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그 조직은 후금에 대비하기 위해 어융사(御戎使) 이귀(李貴)가 정예병 260여 명을 모집한 것이 모체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가자, 그곳에서 각 군현의 산척포수(山尺砲手) 등 600명을 뽑아 국왕을 호위하게 하고, 이를 어영군이라 하였다.
환도한 뒤 수가 1,000여명으로 늘어나 이를 양분해 500명씩 복무하도록 함으로써 훈련도감과 더불어 수도 방위 및 왕권 호위의 중앙군으로 상설화하였다. 이와 같은 어영군이 군영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인조 말부터 효종 초로 파악된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 종래 병조에 직속되어 있었던 정초청(精抄廳)의 정초군과 훈련도감에 속해 있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설치되었다. 어영군과 마찬가지로 6도 향군을 근간으로 조직, 편제된 금위영의 설치로, 정초군과 훈련별대가 모두 번상군으로 편제되어 있던 것을, 한 영을 설치해 일원화하는 동시에 어영청과 쌍벽을 이루게 한 것이다.
이상에서 본 3군영은 그것을 유지하는 경제 기반은 각각 다르나 임무는 거의 같았다. 즉, 왕권 호위를 위한 궁성의 파수는 물론, 수도 한성의 방위 벽인 도성의 책임 구역을 방민(坊民)과 더불어 수비하는 등 중앙군의 핵심 군영을 이루었다.
총융청은 1624년 이괄의 난을 계기로 설치되었다. 즉, 인조반정 이후 대후금 관계가 더욱 악화됨으로써 수도 외곽인 경기도 일대의 방어가 절실하던 차, 이괄의 난을 맞아 이곳의 방어가 더욱 중요성을 띠게 되면서 제도화된 것이다. 총융군은 경기도내의 정군 · 속오군(束伍軍) 그리고 별마대군(別馬隊軍)으로 조직, 편제되었으며, 그 수는 대개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수어청은 1626년에 수도 외곽의 방어선이 될 수 있는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설치 초기는 경기병마절도사 겸 총융사 이서(李曙)의 관할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1634년부터는 총융사의 관할에서 벗어나고 병자호란 이후 하나의 군영으로 독립하였다.
처음 본청을 서울에 두어 경청(京廳)이라 하고, 수어사가 경청에 있으면서 광주부윤을 부사(副使)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하는 2원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광주부윤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수어사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수어경청을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도록 하는 등의 일원체제로 개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어청은 총융청과 마찬가지로 전 · 중 · 후의 3영과 좌 · 우의 이부체제였으며, 그 운영 기반이나 군사도 경기 군사들로 충당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후기의 중앙군을 5군영제라고 하나 실제 중앙군의 핵심은 훈련도감 · 어영청 · 금위영이었으며, 총융청 · 수어청은 수도 외곽의 방어를 전담하는 군영이었다. 이들 5군영은 1881년(고종 18)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에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