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은 조선시대 군사 제도의 근간을 이룬 일반 양인 농민 출신의 병종(兵種)이다. 고려말에 종친과 대신이 지방의 농민을 징발하여 순번을 정해 서울로 올라와 시위하게 하는 시위패를 운용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사병을 혁파하면서 지방에서 의무병으로 번상시위하는 시위패의 기능이 약화되고 진관체제가 확립되면서 1459년에 정병으로 개칭하였다. 1464년에 영진군이 정병에 합속되어 영진군 계통의 유방정병과 시위패 계통의 번상정병으로 구분하였다. 하위관리 출신자와 양인 상층부가 정병에 소속되었으며 거관하여 영직을 받을 때 상당한 혜택도 부여되었다.
고려 말의 혼란한 내외정세 때문에 재경(在京) 중신들은 지방 각도의 절제사를 겸임하고 수시로 그 지방의 농민들을 골라서 뽑아 군사로 삼아 왔다. 이러한 상태는 조선 건국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종친과 대신이 제도(諸道)의 군사를 나누어 관장하게 한다는 원칙 아래 유력자들은 지방의 농민들을 골라서 뽑아 이들을 징발해 순번을 정해서 서울로 올라와 시위(侍衛)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들이 시위패(侍衛牌)로서 정병의 기원을 이룬다.
그러나 시위패에 대한 지휘권은 물론 그 선발과 군적 관리까지도 유력자인 전병자(典兵者)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시위패는 국방 병력으로서보다는 유력자의 사병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400년( 정종 2) 사병 혁파가 이루어짐에 따라 시위패의 성격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져 병권이 국가 기관에 귀일되고, 또한 왕경(王京)이 외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지도 않는 상황 아래에서, 각 지방에서 의무병으로서 번상시위하는 시위패의 중요성은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지방으로부터 먼 거리를 거쳐 번상하는 불편이라든가, 가뭄 · 흉년 등을 이유로 하여 시위패의 번상을 면제시켜 주는 조처가 자주 취해졌다. 이와 같은 시위패의 중요성 상실은 그 소속 군사들이 다른 병종으로 소속을 옮겨 각 도의 시위패가 선군(船軍)이나 영진군(營鎭軍)으로 흡수되는 결과로 자주 나타나기도 하였다.
시위패는 1459년( 세조 5)에 정병으로 개칭되었다. 이는 북방의 평안도와 함길도에서는 정군이라 불리는 군사가 그 밖의 지방에서는 시위패라 불리는 데서 오는 모순과 불편을 없앤다는 이유에서 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북방의 군익도체제(軍翼道體制)가 남방으로 확산되어 진관체제가 확립됨으로써 지방군 제도가 전국적으로 균질화되었다는 사실이 개재하였다.
1464년에는 영진군이 정병에 합속되었다. 이로써 양인 농민 출신의 의무병은 육군의 경우 정병으로 일원화된 셈이다. 그러나 시위패 계통과 영진군 계통의 두가지 정병은 번상정병(番上正兵)과 유방정병(留防正兵)으로 구분되어 파악되는 것이 상례였다.
정병의 규모는 1472년( 성종 3)의 기록에 의하면 번상정병이 4만 2500명이다. 이들은 8교대로 2개월씩 번상시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근무하는 인원수는 5,310명이었다. 또한, 오위 가운데 충무위(忠武衛)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 경국대전≫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병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로 번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중앙에서의 군사적 중요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특히, 평안도와 영안도의 정병은 전원이 유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병의 중앙에서의 비중을 더욱 낮추어 생각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상의 원칙은 항상 강조되고 대열(大閱)을 거행할 때에는 정병을 도별로 파악해 오위진에 편성시켰다. 따라서 정병이 지니는 일정한 중요성은 부인될 수 없었다.
정병에 속하는 신분층은 양인 농민 가운데 상층부에 위치하였다. 세조 때 군액확장책(軍額擴張策)에 따라 현직(顯職 : 높거나 고귀한 관직)을 거친 관리 신분층이 대부분 정병으로 뽑혀서 배정되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서는 충순위(忠順衛)에 속할 수 없는 하위관리 출신자와 양인 중의 상층부가 정병에 소속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관리 출신자들은 실제로 군역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병은 대부분 양인 농민 출신으로 충당되었다.
정병 가운데에는 기정병(騎正兵)과 보정병(步正兵)이 있어서 마병과 보병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급보규정(給保規定)에는 전자에게 1보(保) 3정(丁), 후자에게 1보 즉 2정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갑사와 더불어 궁성문 파수의 임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번상 근무가 규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입직 군사 가운데 포함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정병은 임기가 차서 해당 관직을 떠나면 종5품의 영직(影職)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사만(仕滿 : 임기만료) 64일이어야 가계(加階)되지만, 잉사(仍仕 : 사만된 뒤에도 계속 근무)를 원할 경우에는 사만 35일에 가계되는데, 정3품까지 오르면 그치도록 되어 있었다.
유방정병의 경우는 번차가 네 번으로 1개월에 교대하도록 되어 있고, 사만 245일에 가계되며, 잉사를 원할 때에는 135일에 가계되는 것이 다를 뿐 특별한 차이는 없다.
정병이 거관해 영직을 받을 때 그것은 신분상 상당한 혜택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거관의 규정은 급보의 혜택과 더불어 의무병으로서의 정병에 대해 군역의 대가로 주어지는 국가적 시혜가 제도상의 보장을 받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