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관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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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복궁 선전관청사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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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선전관이 소속되었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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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선전관이 소속되었던 관서.
내용

당초 선전관은『경국대전』 병전(兵典) 번차도목조(番次都目條)에는 단지 8인의 관원수와 체아(遞兒) 수록(受祿)이 규정되어 있을 뿐, 경관직조(京官職條)에는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아직 정식으로 관아를 이루지 못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뒤에 선전관이 정직(正職)으로 되면서 선전관청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속대전』에는 정3품 아문으로 올라 있고,『대전통편』에는 형명(形名 : 기나 북 등으로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는 신호법)·계라(啓螺 : 왕의 거동 때 북이나 나팔을 치거나 불던 일)·시위(侍衛)·전명 및 부신(符信)의 출납을 장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 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될 때까지 선전관청은 서반(西班)의 주요기관으로 존속되었다. 선전관청의 구성원인 선전관의 수는 때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속대전』의 21인,『대전통편』의 24인, 『대전회통』의 25인 등 20인 남짓한 소수정예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정3품 당상관인 선전관 1인이 행수(行首)로서 예하를 통령하는 책임을 졌다. 그 밑으로 종6품의 참상관인 선전관이 3인, 종9품의 참하관인 선전관이 17인이 있었는데 그 중 2인은 남항(南行)으로 뽑았다.

그 밖에 종6품의 문신이 겸하는 선전관 5인과 종6품의 무신과 종9품의 무신이 각각 겸하는 선전관 38인과 12인 등 겸선전관(兼宣傳官) 55인이 별도로 있었다.

선전관청은 왕명을 전유(傳諭)하는 임무를 맡기 때문에 지망(地望)이 가장 높아 그 청사(廳舍)는 바로 액문(掖門 : 三門 가운데 정문 외에 좌·우에 있는 작은 문) 밖 정방(政房)의 바른편에 있었다. 선전관청의 일기인『선청일기』가 정조·순조·헌종·철종·고종대에 걸쳐 작성되어 106책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선청일기(宣廳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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