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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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지방의 요새지인 영 · 진을 지키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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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지방의 요새지인 영 · 진을 지키던 군대.
내용

조선 초기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당시 외방(外方)의 군사체제로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이 있었다. 이 육수군에 들어가는 군대로는 번상숙위하는 시위패(侍衛牌) · 영진군 등이 있다. 그러나 지방 수호의 중추를 이루는 것은 영진군이었다.

영진군은 1397년(태조 6) 5월에 진(鎭)이 설치되고, 1398년 10월에 영(營)이 설치되면서 진군(鎭軍) · 영군(營軍)이라는 병종(丙種)으로 확립되었다. 영군과 진군은 둘 다 군사였지만, 전자는 병마도절제사가 있는 영을 본거지로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후자는 첨절제사를 지휘관으로 하는 진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으므로 영진군으로 합칭되었다.

영진군은 각 도의 영과 진에서만 복무하였다. 각 군의 인정(人丁)은 시위패 · 영진군 · 기선군 등으로 구분해 파악된 다음 영진군에 입속되는 경우 어떤 영 · 진에 부방(赴防)하여 복무하므로 영진군은 영진유방군(營鎭留防軍)이라고도 불리었다. 영진군은 주로 마병(馬兵)으로 다른 군대와 교대하여 영진에서 당번하며, 당번이 아닌 때는 농민으로 돌아갔다. 이들에게는 봉족(奉足)이 주어졌다. 1404년(태종 4)에는 전(田) 3결 이하의 소유자에게 1호(戶)가 주어지도록 결정되었다. 당번 기간에는 잡역을 면제하는 조처가 이뤄지기도 하였다.

영진군은 지방 수호라는 국방상의 중요성에 비추어 점차 증강되었다. 이와 같은 영진군의 정비는 1415년(태종 15)에 일단락되고,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기재된 도절제사영과 각 진에 배치된 병력을 각 도별로 살펴보면 〈표〉와 같다.

구분\병종별 군관(軍官) 정군(正軍) 유방군(留防軍) 진속군(鎭屬軍) 패속군(牌屬軍)
충청도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 500 500
민(憫)
성진(城鎭)
61 300 361
남포진(藍浦鎭) 63 300 363
경상도 도절제사영 500 500
울산진(蔚山鎭) 399 399
영일진(迎日鎭) 301 301
동래진(東萊鎭) 300 300
영해진(寧海鎭) 300 300
사천진(泗川鎭) 300 300
전라도 도절제사영 498 498
옥구진(沃溝鎭) 300 300
부안진(扶安鎭) 300 300
무장진(茂長鎭) 300 300
조양진(兆陽鎭) 300 300
황해도 도절제사영
풍천진(豊川鎭) 300 300
장연진(長淵鎭) 300 300
옹진진(甕津鎭) 362 362
강령진(康翎鎭) 400 400


도절제사영 진무유방군은 유사시 시위패로 보충한다.
강릉진(江陵鎭)
간성진(杆城鎭)
〈표〉 각 도 영(營) · 진(鎭)의 군사력
*자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참고문헌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초기의 수군제도』(방상현, 민족문화사, 1991)
『한국사』10(국사편찬위원회, 1981)
『한국군제사: 근세조선전기편』(육군본부, 한국군사연구실, 1968)
「조선초기 양계의 익군체제와 국방」(오종록,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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