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청전(靑田).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서 몰락한 선비 승원(承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활고 때문에 1915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학비를 받지 않았던 서화미술원(書畫美術院)에 입학, 1917년 수료한 뒤 스승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기거하며 계속 화업을 쌓았다.
1923년이용우(李用雨)·노수현(盧壽鉉)·변관식(卞寬植)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에 노수현과 함께 2인전을 개최하는 것으로 중단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929년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다. 이어서 추천 작가와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다.
1936년동아일보사 재직시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다. 그 후 1933년에 자택에 설립하였던 청전화숙(靑田畫塾)에서 광복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47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이에 참여하여 추천 작가·심사 위원·고문 등을 역임하며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부터 1961년의 정년퇴직 시까지는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서화미술원과 경묵당 수학 시절인 초기에 안중식의 화풍을 따라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1923년 무렵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하여 횡으로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는 개인 소장의 「산수도」(1919년)와 제3회 및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인 「모연도(暮煙圖)」(1924년)·「초동도(初冬圖)」(1926년)를 들 수 있다.
그의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되는 것은 1945년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농촌의 전원 풍경을 2단의 간단한 구도 속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엷은 먹에서 차츰 진한 데로 변화하는 농담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세계로 승화시키고 있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한국적 서정성을 격조 높게 다루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동아일보사 소장의 「설로도(雪路圖)」(1957년), 개인 소장의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1959년) 등이 있다. 그는 전통적 수묵 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더불어 한국 산야와 전원의 독특한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풍의 화법으로 구현시킨 근대 한국화의 대표적 산수화가이다.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3·1문화상, 1965년 서울시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