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중앙집권적 양반관료 사회로 이행된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을 중심으로 관료 임용이 이루어졌으나, 경직(京職)과 외직(外職)의 구분, 관료 승진의 제한, 겸직 제도의 채용 등을 통해 문벌이 강화될 수 있는 요지가 강했다. 특히 문과(文科) 과거 합격자를 다수 배출하는 씨족(氏族)이 등장하였으며, 이를 중심으로 문벌의식이 형성되어 갔다.
조선 중기 사림(士林) 세력의 등장과 교학진흥책(敎學振興策)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서원(書院)은 문벌의식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사회에서 문벌이 되기 위해서는 집안 대대로 청화요직(淸華要職)을 거친 현관(顯官)을 배출한 환족(宦族)이 되거나, 아니면 학자로 이름을 떨치고, 충절(忠節)·효열자(孝烈者)를 배출해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 원사(院祠)는 사림의 강학(講學)을 위한 장소 제공 및 선유(先儒) 제향(祭享)을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었으나, 가문을 빛낸 현조(顯祖)를 밝히고 세상에 높이 드러냄으로써 문인(門人)이나 후손(後孫)의 신분 유지 기능을 담당하면서부터 그 폐단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이 제시한 ‘갑신혁신정강(甲申革新政綱)’ 제2조에서는 문벌의 폐해를 없애고자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權)을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을 강령으로 설정한 바 있다.
현황
세도정치를 끝내고 집권한 대원군(大院君)은 1868년부터 서원에 세금을 징수하고, 1871년에는 서원과 사묘(祠廟)를 폐지함으로써 전국적으로 47개의 서원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서원과 사묘로 대표되는 문벌 의식은 과거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조선의 서원』(이호일, 가람기획, 2006)
- 『한국의 서원과 학맥연구』(경기대학교 소성학술연구원, 국학자료원, 2002)
- 『조선시대 서원연구』(정만조, 집문당, 1997)
- 『고려 사회사 연구』(허흥식, 아세아문화사, 1981)
- 『조선서원의 성립과정』(정만조, 국사편찬위원회, 1980)
- 『개화기 연구』(이광린, 일조각, 1973)
- 「고려와 조선왕조의 관리등용제도 변화 연구: 음서제를 중심으로」(조성택·최연택, 『한국행정사학지』27, 한국행정사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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