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은 정치현상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비판하는 학문이다. 전통적으로 정치학은 국가와 국가의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과 제도에 관한 연구로 생각되었다. 정치학의 기원은 고대 플라톤의 『공화국』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까지 정치학은 도덕과 윤리학의 성격을 띠었으나, 19세기 이후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가 되었다. 현대 정치학은 과학적 분석방법의 응용에 의한 정치현상의 체계적 연구를 의미한다. 한국에서 정치학은 일본 정치학을 전통을 수용해 그 토대로 삼았고 점차 미국 정치학을 수용하며 전개되었다.
현대 정치학은 과학적 분석방법의 응용에 의한 정치현상의 체계적 연구를 의미하나, 전통적으로는 국가와 국가의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과 제도에 관한 연구로 생각되었다.
정치문제에 관한 고찰은 고대의 비서구 문화권에도 있었다. 정치학의 기원은 고대 플라톤의 『공화국(The Republic)』(서기전 360)이나 아리스토텔레스(서기전 384322)의 『정치학(Politics)』(서기전 340) 등의 저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정치학은 사회과학 분과 학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된 학문이다. 근대로 보면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의 『군주론(The Prince)』(1515)과 프랑스 계몽주의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1689~1755)의 『법의 정신(On the Spirit of Laws)』(1748) 등을 가까운 기원으로 볼 수도 있다.
19세기까지 정치학은 도덕과 윤리학의 성격을 띠었으며 과학적 의미의 정치학은 정치철학의 성격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과학이 발생하게 됨에 따라 정치학도 사회과학 한 분야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데, 정치학의 자립화는 정치학과 역사학 사이의 분화를 수반했다. 처음으로 정치학을 가르쳤던 학과들 가운데 상당수가 정치학과 역사학을 함께 가르쳤고 양자 사이의 분화가 불분명했다. 이후 정치학자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정치학을 역사학과 구별하려 했다. 첫 번째 방식은 “역사학은 과거의 정치학이고 정치학은 현재의 역사학이다”라는 식으로 당대사(當代史)에 초점을 맞췄다. 또 하나의 방식은 정치학자들은 정부라는 제한적인 문제 혹은 정부와 관련된 공식 정치 기구들에 초점을 맞추며 포괄적인 역사학과 거리를 두었다.
정치학의 대상과 주제에 관한 논의에는 크게 국가현상설과 권력현상설이 있다. 국가현상설에서 정치학의 대상은 국가의 목적 · 기능 · 존재양식 등 국가에 관한 현상이었다. 정치학은 처음에 국가에 관한 철학적 연구로 출발하였으나, 근대 이후에는 법학적 연구와 결합되어 국가주권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주권론은 근대국가형성기의 군주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절대군주주권론에서 출발하였으나 근대적 자연법에 의한 개인의 기본권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국민주권이론으로 변화되고, 20세기 다원적 국가이론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실증주의는 국가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통적인 법학적 국가이론을 탈피한 국가학(Staatswissenschaften)이 등장했다. 국가학은 19세기 독일 정치학의 주류였고, 정치학의 창설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독일에서 훈련을 받았다.
다른 한편 권력현상설은 정치의 본질을 지배와 피지배로 규정하고, 정치학의 대상을 권력의 획득 · 유지 및 확대와 관련된 모든 환경 · 조직 · 상황 및 인간활동으로 간주했다. 권력현상설은 정치학의 대상을 국가로 한정하지 않고 국가 내의 사회집단과 국가와 국가 간의 권력관계로 확대시켜 국내정치과정과 국제정치를 해명하고자 했다.
초기 정치학은 본질적으로 이론적인 면이 매우 취약했다. 거대이론 차원이건 중범위 이론 차원이건 공통적 연구 주제였던 공식적인 법과 제도 중심 접근법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가설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비이론적이었다. 하지만 방법론에서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유럽역사 철학에 대한 초기 미국 정치학의 반발은 경험적 사실을 둘러싼 논의의 기반을 다지는 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들 초기 연구는 정부의 법이나 제도적 측면들에 대한 정보를 제시하는 사례 연구에 집중된 한계가 분명했다.
이 점에서 분과 학문으로서 초기 정치학을 구축한 것은 이후에 정치학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바로 독자적인 분과 학문으로서 정치학 구축을 통해 당시 선진적이었던 유럽적 전통과 단절하고, 미국 중심 정치학은 유럽을 앞설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마련하고자 했다.
행태주의 혁명의 시작은 역사적 접근법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했다. 물론 1960년대 이전에 행태주의가 전면화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나치의 등장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마르쿠제 등 독일 사상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 대학들에 정착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들은 규범적 정치 이론을 강조하는 흐름을 미국 정치학계에 다시 주입했고, 이로 인해 행태주의적 정치학 연구는 잠시 중단됐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정치학에서 행태주의는 점차 확산됐고, 행태주의 혁명은 2가지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한 가지는 정치학이 포함하는 범위를 정부의 공식적 제도가 아닌, 정치 체계의 작동에 핵심적인 비공식적 절차와 행태인 이익집단, 정당, 대중 매체, 정치 문화, 정치 사회화 등과 관련된 주제를 연구범위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또 하나의 특성은 행태주의자들은 이론과 방법에서 과학적 접근법을 중시했다. 다시 말해서 모호하고 세밀화된 이론과 몰이론적 경험주의자들에 맞서 체계적인 이론과 이에 대한 경험적 검증을 강조했다.
정부 공식 제도 이외로 연구 범위가 확장되자 정치학은 다른 분과학문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는데, 행태주의 시기 대표적인 것이 당대 거대이론이었던 구조기능주의였다. 이를 통해 행태주의자들은 국가 이외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과정에 관심을 기울여 정치에 대한 환원주의적 해석을 강조했다. 하지만 행태주의자에게 국가는 블랙박스(black box)로 여겨져 이를 통해 행위자들의 구성과 그들 간 상호작용 방식을 국가가 독자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망각했다. 그 결과로 정치는 행위자들이 특정 기능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혹은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소되는지에 대한 반영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방법론이란 측면에서 행태주의는 이전과 두드러진 변화를 가져왔다. 행태주의 분석에 있어서 대부분의 형태는 사례 연구와 소규모 비교였지만, 비교 분석으로 확대되었다. 그 밖에도 유럽 국가 중심의 경험적 연구의 범위가 유럽 소국이나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독립국 등 제3세계로 넓혀져 갔다. 방법론적으로도 기초적인 국가 간 통계분석 등 ‘통계 분석’이 새롭게 도입되어 정치학의 방법론적 혁신을 이끌었다.
정치학에서 행태주의의 지배력은 1966년을 전후해서 종결되고 포스트행태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포스트행태주의라고 불리는 흐름은 다양했는데, 립셋과 로칸의 사회균열과 정치균열, 헌팅턴의 『변화하는 사회의 정치 질서』, 사르토리의 『정당과 정당 체계(Parties and Party System)』등 이전 세대의 연구와 이들 다음 세대들인 레이프하트(Lijphart)의 협의체주의, 슈미터(Schimitter)의 코포라티즘, 스테판(Stepan)의 군부 연구 그리고 오도델(O’Donnell)의 권위주의 붕괴 및 스캇(Scott)과 스카치폴(Skocpol)의 혁명 연구 등이 새로운 포스트행태주의 흐름이었다.
포스트행태주의 시대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급진주의 가치가 공존하는 시기였으며, 주요 논쟁도 상이한 가치를 지닌 연구자 사이에 일어났다. 다만 이들 간에 공유된 흐름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과 그 대안의 모색이었다. 정치학은 근본적인 사회적 또는 경제적 토대로 환원되어 설명가능하다는 행태주의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따라서 포스트행태주의는 경제 · 사회로부터 자율적인 정치를 재정의하고 정치적 결정 요소들을 강조했다. 정치의 고유성에 대한 포스트행태주의자들의 강조가 이전 시기 정치행태나 이익집단 연구 등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포스트행태주의 경향은 스카치폴의 “국가에 제자리를 찾아주기” 등 주장처럼, 행태주의 연구에서 배제되었던 공식 제도들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이들은 정치가 독립적 영향력을 지닌 인과적 요인이라면, 선거제도, 정당의 구성 등은 정치학 고유의 영역이라고 파악했다.
다른 한편 포스트행태주의는 구조기능주의 대신 거대이론을 구축하기보다, 중범위이론(middle-range-theory) 발전에 관심을 지녔다. 거대이론을 거부한 결과, 이론화에 대한 노력들은 통합적인 단일 이론을 창출하려는 시도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그 결과 고립된 ‘이론의 섬들(islands of theory)’이 형성됐다. 이익집단, 정치 문화, 군부와 같은 전통적인 연구 이외에도 국가의 형성과 혁명,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붕괴와 이행, 민주주의 제도, 사회민주주의, 경제 발전 모델 등 생산적이고 창의적 연구들이 나오게 되었다.
방법론적으로 포스트행태주의 시기 연구는 사례 연구(case study)와 소규모 비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들 방법들은 현지 조사를 통해 얻어진 심층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지역연구 경향이 강했다. 행태주의 시기 구조기능주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으나 경험적 검증을 강조하는 행태주의의 방법론은 지속됐다. 하지만 이 시기 정치학 연구의 중심은 양적 연구가 아니었으며, 양적 연구는 지배적인 흐름이었던 질적 연구의 전통에서 활동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무시되었다. 이들이 양적 연구를 사용하기 꺼렸던 이유는, 이전 시기 조사 자료(survey data)에 기초한 정치 문화 연구 등이 지닌 제한성 때문이었다. 즉 양적 연구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에서만 발전했으며, 당시 대부분 국가는 비민주적 상태였으며 선거, 민주주의 제도, 나아가 시민들의 태도 등에 대한 문제들은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결국 포스트행태주의 시기에 양적 연구 전통과 질적 연구 전통을 낳았지만 양자 간의 생산적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1989년 이후 새로운 과학혁명을 주창한 논자들은 거대이론 구축을 목표로 했던 행태주의자들과 유사한 경향이 존재했다. 다만 행태주의자들과 비교해보면, 이들은 과거 거대이론인 구조기능주의와 달리, 경제학에 전적으로 의존한 거대이론인 합리적 선택론의 게임이론적 적용을 구축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합리적 선택 제도주의는 제도를 정치현상의 제약 요인으로 여겼으며, 이전 시기 일반이론을 주장했던 행태주의와는 달리, 핵심적으로 행위에 대한 일반 이론 구축에 집중했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경제적 · 사회적 행위와 구분되는 정치적 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들은 정의하지 않았다.
방법론적으로 과학적인 이론화를 지향했던 합리적 선택이론은 논리적 엄격성과 이론화의 방법으로서 수학 모형에 기초한 이론화를 주장한 연구자들보다 더욱 논리적 엄밀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이들은 현상에 대한 경험적 검증이라는 양적, 통계적 방법의 사용을 강조했다. 이처럼 1989년 이후 합리적 선택론, 정형적 이론, 양적 방법이라는 세 흐름이 포스트행태주의의 대안으로 부각됐고, 이들은 이에 입각해 민주화, 투표, 정부 형성, 경제정책 등 영역 연구를 진행했다.
이 시기 첨예한 논쟁은 무엇보다 합리적 선택이란 이론의 위상을 둘러싼 문제였다.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은 그들의 분석에 제도를 포함시키기 시작했고, 이들의 논쟁이 합리적 선택 제도주의와 역사적 제도주의를 중심으로 진행됨에 따라, 합리적 선택이란 거대이론의 독특성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됐다. 동시에 방법론적으로 양적 방법 사용이 증가하는 동시에, 질적 방법론도 다시 활발히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질적 방법에 대한 관심 부활은 서로 상이한 방법론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1989년부터 최근까지 정치학자 간에 핵심적 가치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었기에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등 정치적 논쟁에 기반한 분열은 이전보다 약했다. 이제 정치학 연구는 민주주의에 대한 합의 아래 이전 시기 정치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과 사회변화에 대한 열정은 이론과 방법을 둘러싼 논쟁으로 변했다. 그 결과로 정치학자들의 가치 중심적 개입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정치학 연구에서 정치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은 이전보다 상대화된 상황이다.
한국 정치학의 연구와 교육은 다른 많은 사회과학의 분야와 마찬가지로 1945년 광복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이미 한말 시기에 유길준(兪吉濬) · 안국선(安國善) · 이승만(李承晩) 등에 의하여 서양철학이 도입되었으나 연구와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 한국인에 대한 고등교육의 기회가 매우 제한되었고,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에는 정치학과가 없었다.
초창기 한국 정치학은 일본 정치학의 전통을 받아들여 그 토대로 삼았고 점차 미국 정치학을 수용하며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치학의 도입과 관련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정치학의 연구와 교육은 일본의 것을 모방하였다. 초기 정치학의 연구와 교육에 종사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본의 고등교육을 받았고 그 유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초기 한국 정치학은 독일에서 발달한 국가학의 성격을 반영했는데, 그 이유는 전전(戰前)의 일본 정치학계에 있어서는 독일 국가학의 전통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초기 정치학의 주제는 ‘국가론’ · ‘국가주권론’이었으며 각국 정치제도에 대한 역사적 비교연구가 이루어졌다. 방법론의 측면에서 볼 때 정치학은 법학 · 역사학의 성격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른 한편 영국의 다원적 국가론이 연구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두 번째, 한국 정치학은 점차 미국의 학제와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미국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유독 강하였고, 19세기 대부분의 대학이 정치학과를 설치하고 있었다. 광복 직후부터 1948년 정부수립 전까지의 과도적 미군정 하에서 대부분의 대학이 정치학과 또는 정치외교학과를 설치하게 된 것은 미국식 학제도입의 영향이 컸다. 당시 미국의 정치학은 독일의 국가학과 대조적으로 국제정치 분야 연구를 중심으로 했다. 초기 한국정치학이 정치외교학과라는 명칭을 지닌 학과를 설치하게 된 원인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정치학 연구나 교육은 학문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훈련된 전문연구자 부족, 연구 자료나 문헌 결핍 등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제정치면에 있어서의 연구도 국제법이나 외교사 등 전통적 방법에 의존하여 연구가 이루어졌다.
세 번째, 초기 한국 정치학은 이념적 지향이 강했다. 해방 이후 이념적 분화의 강화와 대안 정부의 성격에 관한 논쟁이 심화되어 정치학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반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분단과 냉전 아래에서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흐름이 강화되어 학문적 편향성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연구 경향이 정치학 연구와 교육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고, 파시즘과 공산독재정치에 대한 비판적 연구가 더불어 진행되었다. 그러나 방법론의 측면에서 여전히 한국정치 연구는 규범적 이론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민주정치에 관한 제도적 연구도 정치현상에 대한 서술적 수준에 그쳤다. 1950년대 들어서 고등교육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 대학원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하기 시작하였고, 상당수 대학의 정치학과와 정치외교학과는 이들 신제학위소지자로 충원되었다. 따라서 이전 시기에 비해 정치학연구의 분야도 확대되었다. 국제정치 분야, 미국식 정부론, 비교정치 분야 등이 연구도 교과과정에 도입되었다.
점차 한국정치 연구에서 일본 정치학의 전통이 퇴색하고 미국 정치학의 주류적 흐름인 근대화론, 행태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정당 · 의회제도 및 정치과정 분야 연구가 번역, 출간되고 연구도 활성화되었다. 단적인 예로 1954년과 1955년에 발표된 논문과 저서를 보면 단행본의 경우 2년 동안에 발간된 권수는 1945~1955년의 10년간 발간된 권수의 반 이상이었다. 이러한 단행본과 논문의 출판은 그 뒤로 계속 증가추세를 보였다. 이 시기부터 대부분의 대학이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지를 간행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연구 활성화 요인이었다. 더불어 『사상계』등 월간지에 정치학 분야 논문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정치학 연구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발간된 정치학 교과서와 논문은 정치학의 정의 · 범위 및 방법론에 대한 초기적 관심이 드러났다. 이 시기로부터 정치학의 체계적 연구를 위한 의식적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국가학적 정향과 정치이념의 정향은 여전히 존재했고,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과거에 비해 높아졌지만 과학적 정치학 연구를 위한 기법에 대한 천착은 부족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과학적 정치학의 정착은 1960년대부터였다. 1950년대 후반 미국정치학의 행태주의가 소개되고,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행태주의에 관한 이론적 연구와 동시에 행태주의적 접근방법에 의한 경험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행태주의를 포함하는 과학적 접근방법은 전통적 정치학의 유산이 강했던 한국 상황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행태주의와 함께 미국에서 발달된 정치에 대한 사회학적 및 심리학적 접근방법의 도입, 체계분석이론 · 집단이론 · 엘리트론 · 정치의식론 및 투표행태연구 등은 이전과 구분되는 정치학 분과학문의 정립 과정이었다. 더불어 이전 시기에 소홀하게 여겨졌던 정치학연구 방법론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정치학자들이 귀국하여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미국에서 배운 연구 방법론에 기반하여 연구와 교육이 진행됐다.
이처럼 정치학의 과학화와 더불어 정치학의 연구대상은 현실문제로 확대되어 근대화, 국가안보, 통일 및 남북대결 등의 문제가 주요 연구대상이 되었다. 비교정치 분야에서도 개발도상국가에 대한 비교연구가 이루어졌다. 반면에 서구 민주정치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가 고조되었다. 이는 1960년 4 · 19혁명 이후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상당수 정치학자들이 민족주의이론을 전개하였고, 특히 신생국 민족주의의 비교연구는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정치학은 이전과 다른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한국 정치학의 토착화가 강조되었고, 다른 한편 정치학연구의 대상을 정치이념과 지역연구라는 측면에서 확대시켰다. 한국 정치학의 토착화 논의는 이미 1950년대 말에도 존재했고 196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정치 연구에서 정치학의 토착화는 한국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 정치를 연구하자는 의미가 존재했다. 더불어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가 제기되었던 시대적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대학 교과과정에는 한국정치에 관한 다양한 교과목이 신설되었고, 냉전이라는 조건 아래였지만 사회주의권에 대한 연구의 폭도 넓어졌다. 그간 사회주의권에 관한 연구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하여 이루어질 수가 없었으며 반공주의라는 정치사회적 조건, 전문가와 연구 자료의 부족 등으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서 국제적 테탕트 도래와 해외에서 사회주의권 연구를 진행하였던 전문가들의 귀국 및 도서문헌자료의 점진적 개방으로 인하여 연구가 맹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일부 공산권연구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한국정치 연구는 새로운 흐름이 도입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민주화 등 급격한 정치 · 사회적 변동을 설명하기 위한 문제의식이 한국정치 연구에도 도입되었다. 당시 사회민주화라는 흐름에 조응해서 국가론, 종속이론, 계급론, 권위주의론 등 이론과 이에 근거한 한국정치 연구가 활성화됐다. 또한 1887년 한국 민주화 이행과 공고화는 국제적인 학문적 쟁점으로 자리 잡아서 민주화 이행론, 공고화론 등이 소개되고 구체적인 정치현상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1990년대 군부정권의 퇴진과 민간정부(문민정부)의 등장, 지역주의 투표행태, 여 · 야 간 정권교체라는 변화 속에서 시민사회론, 정당론과 투표행태론 그리고 민주주의론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정치학은 지난 60여 년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은 발전을 거듭해왔다. 1945년에서 1972년에 걸쳐 정치학의 논문과 단행본수는 15만을 넘었으며, 그 수는 이후 뒤에도 계속 증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