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남북공동성명 ()

74남북공동성명 발표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정치
사건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
이칭
이칭
남북공동성명, 7·4공동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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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7·4남북공동성명은 1972년 7월 4일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이다. 1971년 박정희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제안하면서 개시되었다. 공동성명의 조국통일원칙은 자주적 통일,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 대단결 도모였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대화의 동력을 상실하였고, 같은 해 8월 북한이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거부하면서 종료됐다. 그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공동성명 이후 한국에서는 유신체제가, 북한에서는 유일체제가 등장하였다.

정의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남북 간 정치적 대화통로와 한반도 평화정착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한 당사자 간의 최초의 합의 문서.
역사적 배경

7 · 4남북공동성명의 배경은 적십자예비회담과는 별도로 비밀 실무자 접촉을 제의하여 제9차 남북적십자예비회담 다음날 별개의 남북간 정치적 대화통로를 마련한 데 있다. 이 공동성명은 1971년 박정희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안하면서 개시되어, 1973년 8월 북한이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거부하면서 종료됐다.

1970년 박정희 정권은 8 · 15 경축사에서 “북괴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을 포기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고 남과 북의 체제 중 어느 쪽이 더 국민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언급했다. 이후 남한과 북한은 1972년 8월까지 25차례에 걸친 적십자 예비회담을 개최했으며, 1972년 8월부터 1973년 7월까지 7차례의 본회담을 개최했다. 이 과정에서 7 · 4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되고 정치문제를 다루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초기 적십자회담이란 인도적 사안에서 정치대화로 전환한 시점은 1971년 11월 20일부터 1972년 3월 22일까지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신임장을 지참한 한국적십자사의 정홍진(鄭洪鎭)과 북한 노동당 김영주(金英柱) 조직지도부장의 신임장을 지참한 북한적십자사의 김덕현(金德鉉) 실무자 사이에 판문점 비밀접촉부터였다.

하지만 1971년 적십자 회담이 시작된 뒤에도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도발 위협을 강조했고,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때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근거는 남북대화와 국제정세 변화라는 ‘데탕트 위기론’이었다. 구체적으로 긴장완화란 이름 밑에 열강들이 약소국을 희생의 제물로 삼을 수 있고, 비상조치가 평화통일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고 남북대화의 적극적 전개와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대응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경과 및 결과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평양 방문으로 공동선언의 대략의 틀이 합의되었다. 그 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김영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한 박성철(朴成哲) 제2부 수상이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해 공동선언의 공개를 주장했으나 초기에 박정희 정권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1972년 1월 10일 김일성의 요미우리 신문과 인터뷰에서 남북평화 협정 체결, 불가침조약 체결, 주한미군 철수, 남북한 군사력 감축 단계 실시 등 적극적 평화 공세로 양자 간 논의 사항을 공개하자 공동선언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6월 중순부터 정홍진과 김덕현이 판문점에서 접촉해 공동선언 문안 작성을 위한 실무접촉을 가졌고, 6월 28일에는 공동선언에 가서명했으며 7월 4일에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 남북간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켜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6월 29일이후락 · 김영주 양자의 합의내용 서명을 끝내고, 7월 4일 오전 10시 쌍방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을 발표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쌍방은 ①긴장상태 완화, 상대방 중상비방 중지, ②무장도발 중지,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고 방지 합의, ③남북 사이에 다방면적 제반 교류실시, ④적십자회담 성사 적극 협조, ⑤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개설, ⑥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구성 운영, ⑦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엄숙히 약속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1973년에 들어와 남북대화는 동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접촉이 지연되고 더 이상 대화진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미국 대통령선거 직후 김종필은 워싱턴을 방문해 남북대화의 실질적 진전이 어려움을 설명했고, 미국도 1973년 중반에 들어 더 이상 박정희 정권에 남북대화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호혜평등의 원칙 하에 모든 국가에 문화를 개방, 북한이 한국과 같이 유엔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1973년 6 · 23 평화통일 외교정책선언은 대북한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해 북한을 고립시킨다는 의혹을 샀다. 공동성명 선언 직후 1973년 8월 28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위원장 김영주는 ‘두개의 조선’을 추구하는 6 · 23선언의 폐기를 요구하며 남북대화 종결을 선언하면서 7 · 4남북공동성명 국면은 막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7 · 4남북공동성명은 한국전쟁 이후 남북 사이의 정치적 대화통로를 마련했다는 점 이외에도 고위급 정치회담을 통하여 공동성명을 합의 발표함과 동시에 상호 방문을 통하여 쌍방의 당국 최고책임자를 만나 남북문제를 논의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하지만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은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박정희 정권은 미국, 일본의 북한 승인과 북한 공식 국호 호칭 사용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강력히 반대했다.

박정희 정권은 닉슨독트린 이후 데탕트를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가 아닌 위기로 판단했고, 이는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으로 이어졌다. 7 · 4남북공동성명을 전후로 한 시점에서 박정희 정권의 우선순위는 국내정치였다. 결국 7 · 4남북공동성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한 당사자간 합의라는 역사적 의의에도, 남북 상호간의 공존의 의지가 결핍된 현실로 인해 단명으로 끝나고 한국에서는 유신체제가, 북한에서는 유일체제가 등장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분단의 히스테리』(홍석률, 창비, 2012)
『냉전의 추억』(김연철, 후마니타스, 2009)
『북한개요』(국토통일원, 1986)
『남북대화백서』(국토통일원, 1985)
「공동성명 전후의 남북대화」(김지형,『사림』30, 2008)
「유신체제 수립 원인에 관한 재조명: 북한 요인의 영향과 동원을 중심으로」(신종대,『사회과학연구』13-1, 2005)
「1970년대 전반 동북아 데탕트와 한국 통일문제」(홍석률,『역사와 현실』42, 2001)
「박정희는 왜 김일성의 정상회담 제의를 거절했나」(강인덕,『신동아』1월호, 1993)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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