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은 해방 이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 육군본부 정보국차장, 국무총리 안보담당 비서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24년에 태어나 2009년에 사망했다. 1943년 울산농업학교를 졸업하였고 1944년 일본 육군 하사로 전역했다. 해방 이후 미국에서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귀국하여 특수부대를 창설하였고 미국 CIA에 의해 정보부대의 책임자로 낙점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 시절에 정보기관에서 활동했다. 1972년 박정희의 밀사로 김일성을 만나 7·4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켰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해임되었다가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해방 후인 1948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을 지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본부에서 정보 수집과 첩보 활동을 하다가 1951년 대령으로 진급해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역임했다. 정보국 차장 시절 맡은 주요 업무는 HID(북파공작원)를 총괄하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하며 정보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1957년 10월 귀국했으며,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없어 보직을 받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1958년 국방부 내의 제79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이때 만든 79부대(호실)는 국방부 내의 정보조직이었다. 한국의 정보부대 창설은 미국 CIA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는데, 미국 CIA 한국지부는 업무 교류를 위해 정보부대의 창설을 제안했고, 국방부 장관 김정렬은 3군 정보요원을 차출해 중앙정보부라는 통합부대를 창설했다. 미국 CIA는 정보부대의 책임자로 이후락을 낙점했고, 이를 한국 정부에 요청해 관철시켰다.
국방부 중앙정보부(79호실) 시절 이후락은 이승만의 밀명으로 라오스에 잠입해 라오스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익 노사반(Phoumi Nosavan)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의 지원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그는 베트남 대사였던 최덕신의 도움으로 노사반을 만났는데,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승만 정부는 백선엽 합동참모의장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을 조직해 파병을 검토했지만 미국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4 · 19 직후인 1960년 5월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해체되자 이후락은 국방부 정보담당관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11월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만들어지자 연구실장이 되었다. 장면 총리는 미국 CIA 한국지부의 권유에 따라 국무총리실 소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었다. 1961년 1월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설치되자 미국 CIA는 이후락을 기관의 책임자로 지목했고, 그는 미국의 지원으로 육군 소장 예편과 함께 정보연구실장(차관급)으로 취임했다. 이와 동시에 국무총리 안보담당 비서관을 맡았다.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시절 주한미국대사관에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으며, 박정희와 그의 주변 인물을 감시하며 쿠데타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1961년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군사혁명위원회는 이후락을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미국에 제공한 혐의로 체포하였으나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인 김재춘 대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대령에 의해 구제되었다. 이후 공보실장 겸 대한공론사 이사장직을 겸임하고 『Korea Republic』지를 개편 발행하면서 주한 외국인에 대한 군사정권의 홍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1963년 12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고, 1969년 10월 3선 개헌 직후에는 주일본 대사로 임명되었다.
1970년 초부터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협상을 준비했는데, 그해 12월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의 총괄을 맡았다. 이후 1971년 9월 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었고, 박정희는 이후락을 평양에 밀사로 보내 김일성을 만나도록 했다.
1972년 5월 4일 새벽, 김일성과 남북 비밀회담을 가졌고, 이 회담 직후 남북 간 합의 하에 7 · 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주요 내용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확인하고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직을 맡아 남북협상을 주관하고 북측 대표자들과 면담했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1973년 12월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해 문제가 된 ‘윤필용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고, 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결국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공작 내용은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1973년 비밀 외교문서」 자료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후 1973년 12월 19일 심장병 치유를 이유로 영국령인 바하마 제도로 출국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회유로 다시 귀국했다. 그 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78년 12월 국회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1979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0 · 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자 그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1982년 울산장학회를 만들어 장학 사업을 벌인 것 이외에는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85년 정치활동 규제에서 풀려났지만 사망할 때까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고, 2009년 10월 31일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상훈으로는 금성충무무공훈장, 청조근정훈장, 1등수교훈장, 동성무공훈장, 미국 리전 오브 메리트(Legionof Merit) 훈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