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정변 주도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자신들의 행위를 '군사혁명'으로 규정하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임의 조직을 결성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육군본부 안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박정희 소장, 채명신 준장, 윤태일 준장, 송찬호 준장, 김동하 예비역 소장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경제, 문사(文社), 정보, 행정, 보도 등의 각 분과별 부서를 두었다. 5.16 군사정변 발발 이후 사흘간 혼돈을 거듭하다가 성공 쪽으로 기울어가자 쿠데타 주도 세력은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위원회'로 개칭하였다.
군사혁명위원 및 고문 등 32명은 육군본부에서 혁명위원회 제1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개칭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는 장도영, 부의장에는 박정희가 각각 선출되었고, 14개 분과별로 해당 분과위원이 임명되었다. 이들을 포함한 최고위원은 총 32명이었으며, 대부분 나이 30대의 군인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모체이자 군사 쿠데타 안착 시점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된 과도기적 상황을 관리하고자 조직된 임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쿠데타 세력은 5. 16 군사정변 당일 오전 5시 서울 중앙방송국을 점령하고 자신들이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 이름으로 된 이 포고문에서 군사혁명위원회는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쿠데타의 목적을 천명한 다음 6개 항목에 걸쳐 쿠데타의 목적을 밝혔다.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출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또한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 제1호로서 5월 16일 9시를 기하여 대한민국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으며, '혁명 과업 수행에 협조'를 구한다는 명분하에 옥내외 집회 금지, 국외 여행 불허, 언론 · 출판 · 보도의 사전 검열, 보복 행위 불허, 직장 무단 이탈 및 태업 금지,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야간 통행금지 등을 실시하였다.
포고 제2호는 금융 동결을 비롯하여 중앙 및 각 지방 계엄사령관, 부사령관 등을 임명하는 내용이며, 포고 제3호는 공항 및 항만의 봉쇄 관련 사항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