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군(苦難의 行軍)은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경제적, 대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북한의 대응 태세이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경제난 이후 발생한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설정하였다. 북한은 역사적으로 세 차례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는 1938년 김일성 항일 빨치산 부대의 100일 가까운 행군, 두 번째는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전후한 시기, 세 번째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인데, 흔히 고난의 행군은 가장 최근의 경험인 세 번째 사례를 지칭한다.
북한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인한 내부 충격과 연이어 닥친 대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식량 위기가 발생하였으며 외환난, 에너지난 등 총체적 경제위기에 직면하였다.
특히 심각한 식량난에 처하게 되자 북한은 국제기구를 비롯해 우리나라, 중국, 미국 등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내부적으로 항일투쟁 시기의 혁명 정신으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즉 1996년을 ‘고난의 행군’의 해로 정하고 난관을 스스로 이겨 내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북한은 1996년 신년사, 즉 당보( 로동신문), 군보( 조선인민군), 청년보(로동청년) 등의 공동 사설에서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 인민들은 사회주의 3대 진지를 튼튼히 다지며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야 한다.”라고 하면서 ‘고난의 행군’ 정신을 내세웠다.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 정신을 강조하기 시작하였으나 점차 체육, 과학, 문예 등 사회 전 부문에 걸쳐 요구되는 구호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북한에 몰아닥친 전례 없는 경제난으로 북한 체제의 균열 현상이 나타났다. 1990년대 남한으로 유입된 북한 이탈 주민은 488명에 달하였고 이후 더욱 급증하였다. 1997년 초 황장엽 국제 담당 비서의 망명 사건 또한 북한 권력 내부의 혼란 상황을 반영하였다. 이와 같은 안팎의 위기 속에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정신을 더욱 강조하였으며, 일심 단결을 내세워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듬해인 1997년 10월, 3년 간의 유훈 통치를 마친 후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됨으로써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선포되었다. 이어 1998년에 ‘강성대국론’을 제시하면서 사상, 군사, 경제 면에서의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8월 31일, 인공위성을 표방한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을 발사함으로써 경제만 추켜세우면 강성대국이 될 수 있다고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그 직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이 개정되면서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하였다.
1999년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라는 제목의 신년 공동 사설을 통해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공식화하였다. 따라서 ‘고난의 행군’을 내세우며 내핍(耐乏) 체제 형성으로 김일성 사후 안팎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선에서 ‘주체의 사회주의 강성대국론’을 강조함에 따라 공세적, 적극적 전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나갔다.
‘고난의 행군’ 시기는 2000년 “당 창건 55돌을 맞는 올해를 천리마 대고조의 불길 속에 자랑찬 승리의 해로”라는 공동 사설을 통해 공식적으로 종료를 선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