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원(徐道源)은 1923년 3월 28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8 · 15광복 직후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대구 합동신문사 및 대구 남선경제신문사 기자,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청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 학생주임 등을 지냈으며, 동양사를 강의하였다. 4 · 19혁명 직후인 1960년 말 청구대학에서 1천여 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경북도맹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서도원은 초대 위원장으로서 도예종(간사장), 송상진(사무국장)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1월 11일 자 『 영남일보』에 ‘민민청 경북도맹 준비위원 일동’ 명의로 ‘조국 통일에 대한 호소문’을 발표하는 등 대중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 6일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실무자 회담이 장충공원에서 열렸는데, 서도원은 도예종 · 김금수 · 이수병 · 김상찬 등 민민청의 주요 간부들과 함께 참여하여 학생 회담을 위한 지원 방안을 협의하였다.
5 · 16군사쿠데타 발발 직후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 의해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아 서울교도소에서 복역 중 1963년 12월에 석방되었다. 1964년 제1차 인민혁명당사건(인혁당사건)에 연루된 바 있으며, 1967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69년 김태구 등과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된 바 있다.
1971년 9월경 서울 종로1가 청진여관에서 결성된 경락연구회의 대표로 선임되었다. 경락연구회는 서도원 · 이수병 등이 주도하여 결성되었는데 이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서도원 · 우홍성 · 김세원 · 이수병 등이 결성 논의 당시 참여하였으며, 전통 의학, 자연 건강 교육과 목적을 내세우면서 각 지역의 활동가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 이 조직은 예비 지도 조직의 위상을 띠고 있었으며, 각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사회운동가 중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협의체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서도원은 이 조직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체포, 투옥되었다.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는 서도원 · 도예종 등이 지도위원으로서 조직의 중심을 형성한 것으로 발표하였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사형 판결을 확정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서대문교도소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서도원을 비롯하여 김용원 · 여정남 · 우홍선 · 이수병 · 송상진 · 하재원 등 7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2007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에 따라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