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지로서는 광복 후 최초로 민족지를 표방하고 나섰던 『영남일보』는 1980년 언론기관통폐합조치에 의해 12월 1일부터 『대구매일신문(大邱每日新聞)』으로 개제·발행되었다가, 1989년 4월 복간되어 복간호(지령 11,500호)를 발행하였다.
『영남일보』는 1945년 10월 11일 한응렬(韓應烈)·조약슬(趙若瑟) 등 10여 명의 동인들이 주도하여 창간하였다. 초대 사장에는 김영보(金泳俌)가 취임하였고, 소재지는 대구직할시 중구 서문로 1가 71이었다. B4 2면과 6호 활자를 사용하고 평판인쇄로 발행한 석간지로서, “당파와 알력을 초월하고 3천만 동포에게 진실한 보도전사가 되려고…….”라는 창간사처럼 여론을 주도할 신문이 제대로 없던 과도기의 혼란 속에서 불편부당(不偏不黨:중립의 상태)한 정론을 펴고자 노력하였고, 광복 후 지방지로서는 최초로 민족지를 표방하였다.
『영남일보』는 1946년 출발 당시의 동인제(同人制)에서 주주 200명의 주식회사로 발족하여 발판을 굳혔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전선이 불리하게 되어 대구에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이 신문은 끝까지 버티며 발행하여 초조한 국민들에게 용감한 필봉으로 승리의 신념을 고취시켰다. 당시 주필에 구상(具常), 문화부장 겸 논설위원으로 장덕조(張德祚)가 활약하였다.
1957년 7월 제3대 사장으로 이순희(李淳熙)가 선임되어 운영권을 맡게 되자 폐간될 때까지의 사시(社是)였던 ‘신속정확·직필정론·산업건설·통일촉성’을 마련하고, 편집국장에는 이종률(李鍾律)을 기용하고, 임창순(任昌淳)·이항녕(李恒寧)·이가원(李家源) 등 서울의 학자들을 비상임논설위원으로 위촉하는 등 진용을 강화하였다. 1960년 11월 전용비행기를 구입하여 취재의 기동성을 보강하였고, 1969년에는 고속윤전기 2대를 보완, 설치하여 시설과 건물을 확충하였다.
이 밖의 주요 사업으로 『경북연감』, 1946년 『경북총람』, 1947년부터 『경북연감』과 『한국연감』 등을 발간하였으며, 1978년 2월 1일 통일문제연구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헌수녹화운동·회연장학생(晦淵奬學生)선발·영남일보원호상을 비롯, 축구·야구·테니스·낚시대회 등 전국 규모의 행사를 주관, 개최하였다.
이 신문은 대구지방에서는 계속적으로 단일 제호를 지녀 온 유일한 신문으로 향토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1980년 11월 언론기관통폐합조치에 따라 『매일신문(每日新聞)』에 흡수, 통합되어 12월 1일부터 『대구매일신문(大邱每日新聞)』으로 개제하여 발행되었다.
그 뒤 1988년 3월 복간추진준비위원회가 발족, 1989년 4월 복간호(지령 11,500호)를 발행하였으며 1994년 1월에는 대구 신천동 현사옥으로 이전하였다. 2009년 3월 말 현재 주 196면을 발행하고 있으며, 경산, 청도, 경주, 구미 등 22개 지역에 주재소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