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1951년 10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유엔군과 공산군 간에 휴전회담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문헌에 의하면 판문점일대는 고려시대 송림현(松林縣)지역이었던 곳으로 조선 태종대에 장단군(長66-00}})에 편입되었으며, 송림현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송남면(松南面)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일제시대에 개성군의 일부 지역과 합쳐 장단군 진서면(津西面)으로 되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지역이 개성부(開城府) 판문평(板門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 부근에 널문다리〔板門橋〕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설과 이 마을에 널판지로 만든 대문〔널문〕이 많았기 때문에 ‘널문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널판지 다리를 판문교(板門橋)라고 불렀는데 ≪개성군면지≫에 의하면 판문교는 개성쪽에서 널문리를 지난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6·25전쟁 직전 널문리는 경기도 서북쪽의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仙跡里)와 개풍군(開豊郡) 봉동면(鳳東面) 침송리(針松里)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농촌 마을이었다.
그러나 휴전회담이 이곳에서 진행되면서부터 갑자기 국제적인 이목을 끌게 되었다. 6·25전쟁 휴전협상이 처음부터 이곳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당초 휴전회담 예비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내봉장(來鳳莊)에서 개최되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회담장소 주변에서 북한군이 의도적으로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회담장소의 중립성이 문제가 되자 국제연합국측은 1951년 9월 6일 회담장소 이전을 공산측에 제의하였다.
북한측이 1951년 10월 7일 새로운 회담장소로 널문리 주막마을을 제의하자 국제연합측이 그 다음날 이에 동의함으로써 회담장소가 개성에서 널문리 마을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널문리 판문점을 유명하게 만든 휴전회담을 통해 한국전 교전 쌍방은 우여곡절 끝에 휴전회담 본회의 159회를 비롯하여 총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의를 거쳐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조선)군사정전 협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휴전협정을 조인하게 되었다.
판문점의 위치는 서울 서북쪽 48㎞, 개성 동쪽 10㎞, 평양 남방 약 180㎞, 북위 37°57′20″, 동경 126°40′40″ 지점 부근, 긴 지름 1㎞, 짧은 지름 800m인 타원형 구역이며, 한복판에 휴전선이 있다.
6·25전쟁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사이에 걸쳐 있다. 최초의 판문점 회담장소는 도로변에 초가집 4채가 있던 널문〔板門〕이라는 고장이었으며, 이곳에서 천막을 치고 휴전회담을 하였다. 판문점이라는 이름은 널문이라는 고장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끝나게 되자 휴전협정조인을 위하여 약 200평의 목조건물(북한은 ‘평화의 전당’이라고 함.)을 마을 부근에 세웠는데, 이곳이 두번째의 판문점 회담장소이며, 협정조인 이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이 세번째의 장소이다. 최초의 장소인 널문마을과 두번째 장소인 ‘평화의 전당’은 지금의 판문점 회담장에서 북쪽으로 약 800m 북한측 비무장지대에 있다.
지금의 회담장소도 처음에는 천막으로 시작되었으나 휴전이 점차 장기화됨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항구적인 건물로 바뀌게 되고, ‘자유의 집’(1965)과 ‘판문각’(1968) 등 콘크리트 건물도 세우게 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 남북대화의 빈도가 잦아지자 ‘평화의 집’(남쪽)과 ‘통일각’(북쪽) 등 남북대화용 건물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결국 냉전대결의 산물인 군사정전위원회와 화해와 교류협력을 위한 남북대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되었다.
휴전협정에 따라 판문점은 유엔군과 공산군(북한군·중국인민지원군)의 적대쌍방(敵對雙方) 각 5명씩의 장성급장교로 구성된 군사휴전위원회의 본부구역으로 설정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을 관리하는 장소로 되고 있다.
협정조인 후 이곳에서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가 456차(1990년 말 현재)에 걸쳐 열렸으며,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 언어장교회의, 일직장교회의, 경비장교회의 등 적대쌍방간의 각종 회의가 열리고 있다.
또, 이곳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본부가 설치되어 있으며, 중립국인 스웨덴·스위스(유엔군측 지명)와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공산군측 지명) 등 4개 국의 감시위원이 상주하고 있다.
1971년 8월 20일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위한 남북한적십자 단체의 파견원들이 문서전달을 위하여 이곳에서 최초의 접촉을 하고 1971년 9월 20일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판문점은 군사정전위원회의 회담장소만이 아니라 남북한간의 직접적인 접촉과 회담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남북내왕의 통과지점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남북쌍방은 판문점 자유의 집과 판문각에 남북적십자회담 상설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연락사무소간 직통전화를 가설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남북간의 통신 두절 이후 23년만에 남북간 연락통로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의 비중보다 남북대화의 기능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판문점 구역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북한을 통하는 유일한 도로의 연결점으로 남북한을 내왕할 수 있는 육상통로의 관문이다. 이곳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군사정전위원회의 직통전화가 설치되어 쌍방군대의 최고사령관이 통화할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남북대화를 위하여 설치한 23회선의 직통전화선이 연결되고, 남북한의 연락사무소가 각각 설치되어 있다.
판문점구역은 유엔군과 공산군, 즉 적대쌍방군대가 공점공유(共占共有)하는 공동관리구역으로 지구상에 그 유례가 없는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1976년 8월 18일 북한경비병에 의한 국제연합군측 경비병의 도끼살인만행을 계기로 쌍방경비병을 휴전선을 경계로 분리시켜, 공동관리업무 가운데 경비업무는 분할경비를 하게 되었다.
판문점은 남북한 비교에서 북한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장소로서 공동관리구역인 이곳의 공산군측 관리자는 북한이다. 유엔군측 관리자는 미군이 주축이며 군사정전위원회는 쌍방수석대표만이 발언하도록 되어 있는데, 유엔군측 역대 수석대표는 미군장성이었으나, 1991년 3월 한국군장성으로 바뀌었으며, 공산군측은 북한군장성이 수석대표이다.
지금까지 한국군장성도 유엔군측 대표로 참가하였지만 본회담장에서의 직접발언은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한국이 휴전협정에 직접조인을 하기를 거부하였지만 유엔군사령관의 지휘하에 있는 한국군으로서는 휴전협정을 준수하는 미묘한 처지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이와 같은 상황을 휴전협정 초기부터 최대한으로 대내외 선전에 이용하여왔다. 북한은 판문점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직접 1:1의 담판을 하는 콧대높은 장소로, 한국을 미국에 예속된 존재로 악선전을 하는 직관적 자료(直觀的資料)로 이용할 수가 있었고, 또 폐쇄 고립된 북한이 자유세계를 향하여 불만을 분출시키는 선전장이 되기도 하였다.
판문점이 지닌 이와 같은 요인들은 휴전의 장기화에 기여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판문점은 군사정전위원회와 남북간의 접촉과 대화의 장소만이 아니라, 북한이 미국정부나 미국 국회를 상대로 협상과 접촉을 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이 발생하자, 미국과 북한은 정전위원회 쌍방 수석대표간의 비밀협상을 각기 정부대표의 자격으로 열어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하여 승무원 전원(83명)을 송환하게 하였다.
1990년 5월 28일 판문점에서 북한은 6·25전쟁 당시 북한측 지역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 5구를 미하원의원(원호위원장) 일행에게 인도하였다. 이는 북한이 미국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한 협상과 접촉장소로 판문점을 이용한 사례이다.
이 밖에 북한은 1990년 8월 15일 범민족대회를 판문점구역 안에서 개최함으로써 판문점을 대남통일전선을 목표로 하는 정치집회장으로도 이용하게 되었다. 한편 199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이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주장을 강화하며 정전협정의 무실화를 기도함에 따라 판문점이 정전협정 기구의 회의장으로서의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국제연합군측 수석대표의 한국군 장성 임명(1991.3.25)을 계기로 하여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군사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노골화시켰다.
그 일환으로 정전협정기구 무실화작업에 착수했는데, 먼저 중감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을 철수시켰으며(1993.4.10), 두번째는 군정위에서 북한인원 철수통보(1994.4.28)와 그 다음날 북한군 무장병력 40명의 공동경비구역 진입으로 무력시위 이후 북측 군정위를 대체하는 대표단 명칭(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과 명단(대표 이찬복소장 등 전직 군정위 요원)을 유엔사측에 통보(1994.5.24)하고, 그리고 군정위 대용으로 미군 판문점 대표부설치를 촉구(1994.8.1)하였다.
세번째는 군정위 중국측 대표단 철수(1994.12.15) 및 12월 17일 북한지역에 불시착한 미군헬기 승무원 사망자와 생존자를 위한 북측지역의 판문각에서 쌍방 장성급 접촉(1994.12.21), 폴란드 대표단 중국으로 철수(1995.2.28) 등과 끝으로 북한은 군정위 유엔사의 존재를 부정하고, 북·미간의 군대표 자리만을 인정하여 의도대로 한국을 배제한 북·미 장성급 접촉의 문을 열어놓고 조선인민군의 명(命)으로 정전협정 파기 시사 등 6개항을 유엔사측에 전달했다.
휴전 이후 판문점에서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① 1953년 8월 5일∼9월 6일까지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8만 2493명의 북한군과 중국군 포로가 북으로 송환되고, 1만 3444명의 유엔군 포로가 남으로 송환).
② 1953년 10월 15일∼12월 23일까지 송환거부포로에 대한 설득(2만 2000여 명의 대상자 중 설득되어 송환된 자는 북한군 188명, 중국군 440명 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왔다.). ③ 1959년 1월 27일 프라우다 평양특파원 이동준(李東濬) 탈출 귀순. ④ 1967년 3월 22일 이수근(李穗根) 간첩 위장귀순.
⑤ 1976년 8월 18일 상오 10시 45분 도끼만행, 미군장교 2명 피살 외 9명 중경상, 1978년 10월 27일 제3땅굴 발견. ⑥ 1981년 10월 30일 중립국감독위원회 소속 체코인 일병 망명. ⑦ 1984년 11월 23일 소련인(북한 주재 소련대사관 보조원) 망명, 탈출시 쌍방경비병의 총격전으로 한국군 1명 사망, 미군 1명 부상, 북한군 3명 사망, 1명의 중상이 있었다.
⑧ 1989년 8월 29일 중국군 좌수개(左修凱) 소령 부부 망명. ⑨ 서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1995.5.30)된 우성호 선원 5명(3명은 사망)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1995.12.26). ⑩ 판문점에서 1990년 1월에 남북 국회회담 제10차 준비접촉과 남북고위급회담 제6차 예비회담과 7월에 남북고위급회담 두차례 실무대표 접촉이 있었다.
⑪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1991.12.10)으로 1992년 8월에 3차례의 분과회의가 있었고, 1992년 한해 동안 판문점에서 총94회에 이르는 남북회담이 있은 뒤 1993년 10월에 3차례의 특사교환 실무대표 접촉이 있었다..
⑫ 1994년 3월에 다시 특사교환 실무접촉을 4차례 가진 뒤 6월에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 채택과 7월에 실무접촉을 4차례 가졌으나 김일성(金日成)사망(1994.7.8)으로 중단되었다. ⑬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가 비무장지대(DMZ) 불인정 담화 발표 후 판문점 공동구역 내 무장병력 3차례 투입(1996.4.4∼7).
⑭ 1998년 6월에 2차례의 UNC-북한군간 장성급회담 개최, 정명화(鄭明和) 판문점 중감위 공연(10.20), 정주영(鄭周永) 현대명예회장이 소 1,000두를 두 번 판문점을 통해 지원하고 김정일을 면담(10.27, 12.15).
⑮ UNC-북한, 제9차 판문점 장성급회담에서 북측이 북방한계선의 재협상과 서해충돌사태의 책임자 처벌요구 등 종전의 입장 고수로 결론없이 종료(1999.7.21)되었다. 제11차 장성급회담에서 UNC측이 남북당국간의 협의 입장을 고수하자 북측은 장성급회담 무용론을 펴면서 회담을 종료(1999.9.1)하였다.
그 다음날 제10차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밀입북한 범민련 남측본부 6명이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것 등을 볼 때 판문점을 전략 전술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