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낭청(浪淸). 충청남도 연기 출생. 박노현(朴魯賢)의 아들이다.
공주고등보통학교와 홍익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고, 1969년 연세대학교에서 교육행정학석사, 1982년 중국중화학술원 명예문학박사학위와 충남대학교에서 명예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 이리공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출발하여 대전공업학교·대동고등여학교·공주중학교를 거쳐 1947년 대한민국 교감자격증 제1호로 대전여자중학교 교감, 1951년 최연소로 강경중학교 초대교장, 1956년 부여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중등교육 일선에서 영재교육, 1인1기교육, 정서교육, 노작교육을 통해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1958년 충청남도 장학관, 1960년부터 1965년까지 충청북도 학무과장, 문사국장·교육국장을 역임하면서 지방 중등교육행정 확립에 이바지하였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문교부 장학관, 1973년 전주교육대학 학장을 거쳐 1976년 문교부 장학실장으로서 충실한 교육과정 구현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국민정서 순화와 민족교육 진작에 진력하였다.
1977년 서울교육대학 학장, 1980년 공주사범대학 학장으로 초등·중등교사 양성에 이바지하였다. 정년퇴임 후 1986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인천대학교 학장으로 인천대학교 분규사태를 수습하고 1989년 인천대학교 민선초대총장으로 인천대학교 시립화의 기초를 다졌다.
1992년부터 홍익대학교 초빙교수와 건양대학교 명예교수로 교육에 매진하였으며 홍익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동창회장으로 모교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그 밖에 문교부 기획위원·대한교련 교육연구위원회 위원, 한국교육개발원 심의위원, 문교부 교육정책심의회 위원, 학교법인 공산학원(公山學院)·건양학원(建陽學院) 이사, 민족문화추진회 위원, 대학교육협의회 부회장, 국립사범대학협의회 회장, 교육개혁심의회 위원, 백제문화연구원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교육발전과 문화창달에 이바지한 공적으로 홍조근정훈장 2회 및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1989년에는 연세대학교에서 연세교육인상을 수상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이 세운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 산실인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복원위원회 사무총장으로 봉사하였고, 1991년에는 남북통일기도회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죽은 뒤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그의 유업을 기리는 기적비(記績碑)를 1994년 4월 생가 앞에 세우고, 『낭청선생 추모문집』을 펴내었다. 국역서로는 『충효록(忠孝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