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2022년 5월 9일까지 사용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이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조선총독 관저로 사용하던 이 건물은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라는 이름을 붙여 관저로 사용하다가 1960년 윤보선 대통령이 청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관저를 용산으로 옮기고 청와대를 개방하였다. 주요시설로는 영빈관, 본관, 수궁터, 비서실별관 및 동별관, 상춘재, 녹지원, 대통령 관저, 춘추관이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에 위치한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이 건물은 대통령 집무실을 비롯하여 회의실 · 접견실 · 주거실 등이 있는 2층 본관과 경호실 · 비서실 및 영빈관 등 부속건물이 있고, 정원과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후원 및 연못 등의 미관을 갖추고 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 1960년 8월까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명명으로 제1공화국의 대통령 관저명 ‘경무대(景武臺)’로 불려오다가, 그 해 8월 13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尹潽善)이 선출되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개명하였다. 이 명칭은 대리석으로 된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이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26년(세종 8)에 창건된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으로 후원에 해당하는 이 지대를 경무대라 하였다.
북악산 산록에 위치하여 서울 장안을 전망할 수 있는 이 경무대는 어영(御營: 조선시대, 인조반정 뒤에 조직한 군대의 하나)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으로서, 또는 친경(親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울안에는 원래 융무당(隆武堂)과 경농재(慶農齋: 조선 말엽 경복궁의 뒤뜰에 있던, 각 도의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못됨을 알아보던 집) 등이 있었으나, 일제강점 후 1927년 일제에 의하여 헐리고, 일본인이 조선총독 관저를 건립하였다.
이곳을 제7·8·9대 조선총독이 관저로 사용하였고, 광복이 되어서는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Hodge, J. R.)중장이 사용하다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한국정부로 이관되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동시에 경무대라는 이름을 되찾아 대통령 관저명으로 사용하였다. 이승만(재임 1948∼1960) 대통령은 6·25전쟁의 피난시절을 제외하고 1960년 4월까지 초대 ·2대 ·3대 대통령으로 보낸 12년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4·19혁명에 의한 하야와 함께 이화장(梨花莊)으로 옮겼다.
경무대라는 이름은 3·15대통령 부정선거 등 독재와 비정(秕政)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1960년 8월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입주하면서 청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 뒤 1963∼1979년(5∼9대) 박정희(朴正熙), 1979∼1980년(10대) 최규하(崔圭夏), 1980∼1988년(11∼12대) 전두환(全斗煥), 1988∼1993년(13대) 노태우(盧泰愚), 1993∼1998년(제14대) 김영삼(金泳三), 1998∼2003년(제15대) 김대중(金大中), 2003∼2008년(제16대) 노무현(盧武鉉), 2008∼2013년(제17대) 이명박(李明博), 2013~2017년(제18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거쳐 갔다. 2017년(제19대)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이 입주하였다. 2022년 5월 10일 취임한 윤석열(尹錫悅) 제20대 대통령이 관저를 용산 국방부 청사를 옮기고 기존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개방함에 따라 대통령 관저로서의 기능을 다하였다.
청와대 경내 시설현황과 그 내력을 보면 ① 영빈관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행사를 개최하는 건물로서 1978년 1월에 착공하여 그 해 12월에 준공이 되었다.
이 곳 영빈관은 말 그대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며, 외국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방문했을 때 우리 나라를 알리는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공식행사장으로 이용되거나 100명 이상 대규모 회의 및 연회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영빈관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건물이고, 특히 전면에 있는 4개의 돌기둥은 2층까지 뻗어 있는 높이가 13m에 둘레가 3m인 기둥이며 내부는 무궁화 · 월계수 · 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② 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건물이며, 1989년 22명의 전문가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많은 의견을 수렴한 뒤 1991년 9월 4일 신축되었다. 이 본관 건물 신축으로 외국의 국가원수나 외교사절이 방문했을 때 우리 전통의 건축양식을 통해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이 건물은 정부와 국가를 대표하는 우리의 얼굴과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전통 목조 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내부 구조는 현대적인 감각과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으며, 우리 나라 건축양식 중 가장 격조가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八作)지붕을 올리고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
약 30만 장이나 되는 청기와는 일반 도자기를 굽듯이 한 개 한 개 구워 내어 1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는 강도를 지녔다고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1층에는 대통령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 연회장, 식당이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 회의실이 있다. 그리고 건물 앞의 넓은 잔디마당은 국빈환영행사와 육 · 해 · 공군 의장대, 전통복식을 입은 전통의장대의 사열 등이 행해지는 곳이다.
③ 수궁(守宮)터인 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은 옛날부터 풍수지리학상 길지(吉地)로 알려져 890년 전인 고려시대에 이곳에는 남경의 이궁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이 곳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으며, 그 뒤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 융무당 · 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또한 이곳은 농사가 ·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왕이 손수 가꾸던 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부터 경복궁을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후원에 있던 건물들을 다 허물고 이곳을 공원으로 조성하였고, 총독관사를 새로 지어 7·8·9대 총독이 사용했다.
일본인들이 여기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그 뒤편에는 총독관사를 지음으로써 조선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용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여 이 나라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총독관사 건물은 大(대)자의 모양을, 총독부 청사건물은 日(일)자의 모양을, 서울시청 건물은 本(본)자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세 글자를 이으면 대일본이 된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이곳은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되던 구청와대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되었는데, 1989년에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면서 구 청와대 본관을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 및 박물관으로 보존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하게 된 것이다.
철거 뒤 그 자리를 옛 모습대로 복구시킨 뒤 옛날 경복궁을 지키던 수궁들이 있었다 하여 지금은 수궁터라 부르게 된 것이다.
④ 비서실별관(신관) 및 동별관은 비서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서, 신관은 1969년에, 동별관은 1972년에 건립되었다. ⑤ 상춘재(常春齋)는 1983년 4월 준공된 전통적인 한식 가옥으로 외빈접견 등에 사용되고 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청와대 경내에는 전통 한옥식 건물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와도 우리 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할 길이 없었던 차에 200년 이상 된 춘양목을 사용하여 전통 한식가옥인 상춘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외빈 접견이나 비공식회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혁을 보면 현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관사로 건축된 일식 목조건물인 상춘실(약 20평)이 있었으나 1977년 12월에 철거하고, 이듬해 3월 천연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약 22평)로 개축하여 상춘재(常春齋)라 명명하였다.
그 뒤 전통한식집을 형태 변경 없이 목재로 보수하는 공사를 1982년 11월 20일 착공하여 온돌방 1개와 대청마루가 있는 연건평 116평의 건물을 1983년 4월 5일 완공하였다.
⑥ 녹지원(綠地園)은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고 일제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 1968년에 약 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했다.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 5월 28일에는 인근 주민 약 3,000여 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310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연혁을 보면 옛 경복궁의 후원으로 채소밭 · 가축사육장 · 온실 등의 부지였으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국내외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⑦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했던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할 필요성을 느껴 1990년 10월 25일 완공되었는데 형태는 전통한식(본채는 八作지붕의 겹처마에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이며 구성은 본채 · 별채 · 대문채 · 사랑채 · 회랑으로 되어 있다.
⑧ 춘추관(春秋館)은 1990년에 완공되었으며,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을 살린 건물이다.
대통령의 기자회견 장소와 출입기자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우리 나라 언론사 기자 78명이 상주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로서 1층은 기자들이 사용하는 기자실과 담화발표 등을 하는 소회견실로 구성되어 있고, 2층에는 대통령 기자회견과 각종 문화행사 등을 하는 다목적실이 있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 · 예문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되었다.
고려시대 시정(그 당시의 정사)의 기록을 맡아오던 관청으로 고려 개국 초에는 사관이라 하다가 1308년(충렬왕 34) 이를 문한서에 병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고쳤다가 1325년(충숙왕 12)에 예문관과 갈라져 춘추관으로 독립했다. 춘추관은 다시 1356년(공민왕 5) 사관으로 개칭하였다가 1362년 다시 춘추관으로 되고 1389년에는 예문관을 합하여 예문춘추관으로 환원되었다.
조선 개국 당시에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예문춘추관이라 하다가 1401년(태종 1) 예문관과 분리하여 춘추관으로 독립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