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는 일제강점기~현대에 만주국 관료, 대한민국 국무총리, 제10대 대통령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농림부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외무부에 종사하였다. 1976년 3월 제12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1979년 10·26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았다.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군[현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에서 최양오(崔養吾)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이고 호는 현석(玄石)이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5년에 홍기(洪基)와 결혼하였다.
1928년 원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32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37년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41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3월 만주로 떠나 다퉁학원에서 정치행정을 전공하였다. 1943년 졸업 후 만주에서 관료로 근무하였으나, 이때의 행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경성사범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있었고, 1946년 미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 1948년 대한민국 농림부 양정과장을 역임하였다.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외무부에 종사하였다. 1951년 UN ECAFE[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 무역진흥회 수석대표, 1952년 주일 한국대표부 총영사, 1957년 주일 한국대표부 참사관, 1958년 제4차 한일회담 대표, 1959년 주일 한국대표부 공사 · 외무부차관 · 외무부장관 직무대행 등을 지냈다.
박정희 정권기에는 1963년 외무부 본부대사 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고문, 1964년 주말레이시아연방 특명전권대사 등을 거쳐 1967년 외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 1971년 대통령 외교 담당 특별보좌관,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대표이자 서울 측 위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다. 1975년 국무총리 서리에 이어 1976년 3월 제12대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1979년 10·26사태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자 국무총리였던 최규하는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았다. 직후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에서 면직하고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하였다.
1979년 11월에는 현행 유신헌법에 따라 새 대통령을 선출한 후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해 민주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논란이 있었다. 이에 따라 대통령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치러지게 되었고, 1979년 12월 6일에 있었던 제10대 대통령선거에서 유일하게 입후보한 최규하 대통령 직무대행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군사 반란으로 인해 대통령으로서의 실권이 없었고, 당선 후 약 8개월 만인 1980년 8월 16일에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대통령 사임 이후 국정자문회의 의장,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6년 10월 22일 급성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대통령 사임 직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최규하는 외교 관료로서 능력과 전문성이 뛰어나 탁월한 경력을 쌓았고, 실리 외교를 추구하여 국익을 도모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을 통해 국민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직무대행 시 개헌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일관성이 없었고, 대통령 재임 중에 일어난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적절한 조치와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또한 대통령 사임 이후 진술과 증언을 거부하며 침묵을 지켰다는 것에서 비판을 받았다. 과도기 대통령으로서 결단력과 장악력이 부족하였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