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1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배재고등보통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개성에서 병원을 개업하였다. 1945년 10월 보건후생부 파견 의사 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미시건대학 공중보건학부에서 결핵을 전공하고 공중보건학 석사학위[MPH]를 받았다.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
1948년 1월 서울시 보건위생국장에 임명되었고, 1949년에 사회부차관에 임명되었다. 1949년 6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제2차 세계보건기구[WHO, World Health Organization]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세계보건기구 가입이 승인되었다.
1950년에는 한국개척지도원 명예소장에 이름을 올렸고, 1952년 1월 사회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전쟁 중에 사회부장관을 맡은 최창순은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이탈되지 않도록 하고, 주1과 빈민층의 생활 기초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전재(戰災)로 인한 군경원호에 진력하겠다는 3대 목표를 밝혔다. 약 9개월간 사회부장관으로 재임하였다.
1952년 10월 말 스리랑카 세이론에서 열린 정신재무장아세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1952년 11월 자동차기술협회 부총재에 선출되었고, 이후 대한중공업 초대 이사장, 대한결핵협회 회장, 대한소년화랑단 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소년화랑단은 소년운동과 피난민 구제 사업을 목적으로 내세운 단체였는데, 1956년 3월 31일 서울 탑골공원의 팔각정 앞에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 언론에 자주 거론되었다. 그런데 동상 건립 공사비를 납부하지 않아 고소를 당했고, 이어서 동상 건립 기금 횡령, 253세대에 달하는 피난민 이주지 알선금 횡령 등의 추가 혐의를 받았다. 최창순은 횡령금을 착복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부정하게 획득한 자금을 대외교제비와 정치운동비라는 명목으로 사용하였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고급 아편을 상습적으로 사용하였다는 보도도 있었다. 다만, 아편의 경우 구체적인 물증은 발견되지 않아 불기소 처리되었다. 이 사건 이후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으며, 사망 관련 보도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