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지주 박민훈(朴敏訓)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6년 초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천안군 읍내에서 대성의원을 개업하였다. 그런데 다량의 모르핀을 밀매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었고,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의사가 사욕을 위해 사회에 해독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강원도 공의로 임명되어 1927년 9월 인제군으로 옮겨갔다. 인제에서 삼산의원을 개업하여 운영하다가 이후 원주 삼산의원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지역 청년회와 기독교청년회에서도 활동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원주면협의회와 강원도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40년 아라이 키요토모[新井淸友]로 창씨개명하였다.
1952년 원주읍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955년 창당된 민주당에서 요직을 맡았다. 1956년 3월 민주당 원주시당이 결성되었는데, 이때 원주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있었던 민주당 강원도당부 결성식에서 강원도당부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57년 9월에는 민주당 원주시당 위원장에 재선출되었다.
1958년 5월 2일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원주시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당시 강원도는 여당인 자유당의 강세 지역이었는데, 현역 의원이던 자유당 함재훈 후보를 800여 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되어 주목받았다. 4대 국회에서 국방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자유당 정권에 대항하여 군인의 선거 간섭, 2·4파동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원주시에는 3대 국회의원 함재훈과 강원도의회 의원이었던 민주당 구파 조한규 등이 출마하여 갈등이 치열하였는데, 이들을 제치고 당선되었다. 1961년 1월 민의원 보건사회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민주당 강원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신파와 구파의 파벌 갈등이 심했던 민주당에서 신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분류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원주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정계에 복귀하여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15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6년 민중당 강원도당이 결당되었을 때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1969년에는 3선개헌 반대 국민투쟁위원회의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다. 1978년 1월 12일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