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8월 7일 이승규(李昇圭)의 맏아들로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증산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종연(李鍾淵), 호는 추강(秋江)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주산면 옥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가담하였다. 이어서 고향으로 내려가 마을의 친인척들을 규합하여 4월 17일 밤 주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 일로 경찰을 피해 다니다가 1919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하고,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의 주선으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에서 체류하다가, 1921년 메사추세츠주의 마운트허먼학교[Northfield Mount Hermon School]에 입학하였다. 뉴욕 컬럼비아대학 신문학과를 1929년에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의 미술철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1938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 유학 때 이승만, 장덕수, 김양수, 허정, 윤치영, 서민호 등과 교류하였다.
YMCA 간사로 임명되어 귀국하여 활동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피체되어 투옥되었다가, 1943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탈출하였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미군정기에 공보부 차장과 공보부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회사무총장 대리직을 수행하다가 1949년 1월 국회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제2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어 1953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공보처장 해임 직후 동남아세아반공민족대회 한국 측 대표단 대변인,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구(舊) 왕궁(王宮) 고문, 대한조선공사 사장 등을 맡았다. 1955년에는 일민주의보급회 부이사장, 1957년에는 세계통신사 사장에 이름을 올렸다.
박정희 정권기에는 월간잡지 『세대』의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잡지는 친여적 성격을 띠었다. 1979년 4월 8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증산리 선영에 묻혔다.
한국전쟁기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신할 때 수행한 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임한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저서로 『왕궁사(王宮史)』[동국문화사, 1954]가 있고, 편서로 『정상의 주변: 신문단평에 나타난 박정희 대통령』[세대사, 196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