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현대, 3·1운동에 참여하고, 미군정청 공보부장, 대한민국 공보처장 등으로 활동한 관료.
인적사항
주요 활동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뉴욕에서 체류하다가, 1921년 메사추세츠주의 마운트허먼학교[Northfield Mount Hermon School]에 입학하였다. 뉴욕 컬럼비아대학 신문학과를 1929년에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동양의 미술철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1938년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 유학 때 이승만, 장덕수, 김양수, 허정, 윤치영, 서민호 등과 교류하였다. YMCA 간사로 임명되어 귀국하여 활동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피체되어 투옥되었다가, 1943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탈출하였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미군정기에 공보부 차장과 공보부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회사무총장 대리직을 수행하다가 1949년 1월 국회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제2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어 1953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공보처장 해임 직후 동남아세아반공민족대회 한국 측 대표단 대변인,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구(舊) 왕궁(王宮) 고문, 대한조선공사 사장 등을 맡았다. 1955년에는 일민주의보급회 부이사장, 1957년에는 세계통신사 사장에 이름을 올렸다.
박정희 정권기에는 월간잡지 『세대』의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잡지는 친여적 성격을 띠었다. 1979년 4월 8일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증산리 선영에 묻혔다.
한국전쟁기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신할 때 수행한 3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임한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저술
참고문헌
단행본
- 『보령군지』(보령군지 편찬위원회, 1991)
논문
- 이원혁, 「보령 주렴산 3·1만세운동의 주역 이철원 자서전」(『애향』 23, 보령문화원, 2019)
- 김영희, 「제1공화국 초기 이승만정부 공보선전활동의 성격」(『한국언론학보』 54-3, 한국언론학회, 2010)
신문·잡지 기사
- 『경향신문』
- 『동아일보』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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