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1925년 3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운동 노선에 따라 구자옥(具滋玉), 박동완(朴東完), 신흥우(申興雨), 유억겸(兪億兼), 이갑성(李甲成), 이상재(李商在)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당시 미국에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혁명동지회(獨立革命同志會)와 안창호(安昌浩) 중심의 국민회(國民會)가 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하와이 독립혁명동지회와 국내 사이의 연락 책임자는 신흥우였다.
1924년 10월에 북감리파총회(北監理派總會)와 기독교청년회 간부협의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신흥우는 귀국길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논의하였다.
신흥우는 국내 동지와 상담하여 “조선의 정세에 적응한 단체를 조직하고, 동지회 본부와도 연락해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는 이승만의 권유에 따라 귀국 후, 같은 해 12월 15일 서울기독교청년회에서 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회를 결성하고 운동의 목적 및 방법을 결의하였다.
1925년 3월 23일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다. 창립회원은 구자옥, 박동완, 신흥우, 이상재 등 12명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흥업구락부원들은 지식인과 자산가층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농사 개량에 대한 강연, 한글 보급 등의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파들의 자치운동을 저지하고,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은 1938년 2월 연희전문학교 ‘경제연구회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조사를 받던 연희전문학교 부교장인 유억겸의 집에서 동지회와 연관된 문서가 발견되어 흥업구락부의 실체와 활동이 발각되었다. 이어 YMCA연합회 총무 구자옥이 체포되었고, 흥업구락부 명부와 활동이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흥업구락부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흥업구락부에 대하여 탄압을 가하면서 회유 정책을 병행하였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이후 흥업구락부원들은 친일단체에 가입하거나, ‘내선일체(内鮮一体)’ 정책에 협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