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완(朴東完)은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호는 근곡(槿谷)이다.
1885년(고종 22) 12월 27일 경기도 양평에서 감목관(監牧官)을 지낸 박순형(朴淳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5세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94년 이전에 서울로 이주하였다. 13세 때 현석운의 딸 현미리암과 결혼하였다. 1941년 2월 23일 하와이에서 병사하였다.
박동완은 양사동소학교(養士洞小學校)·한성중학교(漢城中學校)·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서 수학하였고, 배재학당(培材學堂) 대학부로 전입하여 근대교육을 받으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5년 기독신보사(基督新報社)에 입사하여 『기독신보』의 서기와 주필로 활동하면서 기독교계의 주일학교운동(主日學校運動)을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중순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간사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조선의 독립에 대해 논의하였다. 2월 27일 다시 박희도로부터 3·1운동 참여를 권유받고 당일 이필주(李弼柱)의 집과 28일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서 배포식에 참석하여 일행들과 함께 헌병대에 연행, 구금되었다. 재판과정에서 박동완은 일본이 동양평화를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야 한다면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을 주장하였다. 2년형을 선고받아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1월 만기출소하였다.
이후 박동완은 기독교 언론활동의 일환으로 1923년 7월 『신생명(新生命)』을 창간하였다. 또한 『기독신보』·『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 활발히 기고하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모순의 해결과 민족정신의 진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 소년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3월 조직된 기독교계 비밀결사인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도 참여하였다. 1926년에는 천도교 구파와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과 함께 민족협동전선 단체로서 국민당(國民黨) 결성에 대해 협의하였으며, 신간회 창립을 위한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도 노력하였다. 1927년 2월 창립된 신간회의 총무간사로 선출되어 비타협적 민족진영의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한인들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탄압이 시작되어 1927년 12월 미국북감리회에서 임시재만동포위문회(臨時在滿同胞慰問會)를 조직하였다. 박동완은 이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어 결성된 재만한인옹호동맹(在滿韓人擁護同盟)의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재만한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박동완은 1928년 8월 하와이로 이주하여 와히아와섬 한국기독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31년 하와이학생 모국방문단을 인솔하고 잠시 귀국하였고, 1934년 『한인기독교보(韓人基督敎報)』를 창간하였다. 아울러 미주지역에서 이승만(李承晩)이 주도하는 동지회(同志會)에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1938년 5월 국내조직이 일제에 발각되기까지 흥업구락부와 회원들과의 연락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