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5월 28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했다. 선교사의 권유로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한 그는 졸업 후 만주 안동으로 건너가 청도(靑島)에서 루터교회 독일인 목사를 만나 그의 주선으로 덕화서원(德華書院)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이어 미국유학을 떠나 1926년 미네소타주 햄린(Hamline)대학과 1928년 드루(Drew)신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뉴워크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31년 드루신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311933년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331934년 만주 하얼빈교회에서 사역하다 1934년 귀국한 변홍규는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했으며, 1937년 한국인 최초로 한국성서위원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감리교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의 자립적 운영과 교역자 양성에 노력하던 중 1940년 6월 신사참배·창씨개명 등 일제의 정책을 비난하는 격문이 교내에 살포된 이른바 ‘감리교신학교 삐라사건’으로 정일형(鄭一亨) 등과 함께 구속되고 학교는 10월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3개월 후 석방되어 종교교회(19411943)과 동대문교회(19431946)에서 시무했으며, 1942년 12월 특별총회에서 통리사로 선출되었는데, 이때 일제의 전시체제 협조를 당부하고 비행기헌납을 청원하여 물의를 빚었다. 또 『기독교신문』에 친일적 설교문을 기고했고, 1943년 2월 정인과·양주삼 등과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 미영격멸간담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5년 7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교학국장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감리교회가 복흥파와 재건파로 분열되자 그는 재건파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45년 9월 초교파적 기독교 단일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개최된 남부대회에서 김광우·나사행·이규갑 등과 함께 퇴장한 그는 감리교회 재건중앙위원회를 결성하여 감리교회의 재건을 선언하였다. 이어 1946년 재건된 감리교신학교의 제8대 교장에 취임한 그는 동부연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48년 교장을 사임하고 남산교회에 부임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교회를 설립했고, 수복 후 대교교회·남산교회에서 시무하였다. 감리교회가 통합된 후 1967년 특별총회에서는 성화파·호헌파·정동파 등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제10대 감독에 선출되어 교단의 화합과 발전에 노력하였다.
그는 한국 감리교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이자 경건주의 신앙인이었다. 새벽 4시가 되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금요일 밤마다 철야기도를 했다. 양복 주머니에는 언제가 헬라어 성경이 들어 있었으며, “그의 일생을 평한다면 성서를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모르는 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란 평판을 들을 정도였고, 학위논문 주제인 ‘聖’에 빗대어서 ‘세인트 변(saint Pyun)’이란 별명이 붙었다.
1970년 5월 정년퇴직과 함께 감독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LA한인성서학원 및 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고 콜로라도주 덴버시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76년 7월 27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