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명 구령운동 ( )

개신교
사건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한국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 신자 달성을 목표로 세우고 전국적으로 전개한 초교파적 부흥운동.
이칭
이칭
백만 구령운동, 백만 명 전도, 백만 명 운동
내용 요약

백만명 구령운동은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한국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 신자 달성을 목표로 세우고 전국적으로 전개한 초교파적 부흥 운동이다. 1909년 10월 복음주의선교부통합위원회에서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라는 대규모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부흥사 채프만과 알렉산더를 초빙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연합기도회, 매일기도회 개최, 호별 방문전도, 복음서 판매 등의 활동을 하였다. 초교파적 부흥 운동에도 불구하고 1912년 교인 수는 157,902명이었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한국기독교 부흥운동의 원형이 정립된 계기가 되었다.

정의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한국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 신자 달성을 목표로 세우고 전국적으로 전개한 초교파적 부흥운동.
개설

1900년대 한국 기독교계는 교세의 확장과 함께 정치적 현실과 거리를 두려는 목적으로 원산 부흥운동(1903)·평양 대부흥운동(1907)을 잇는 전국적 대규모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치며 한국 기독교는 교세가 급격히 성장했으나 그 같은 추세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새로운 대규모 부흥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했는데, 그 이면에는 을사조약(1905)·정미조약(1907) 등 일제의 침략에 따른 정치적 문제를 종교적 차원에서 희석시키려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경과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스톡스(M. B. Stokes) 등은 1909년 개성에서 산상 기도회를 갖고 지방 전도여행에 나서면서 교인들에게 1년 내에 5만 명의 새 신자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 목표는 같은 해 1909년 9월 선교연회에서 ‘금년에 20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확대되었고, 10월 복음주의선교부통합위원회에서 다시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각 교파에서는 특별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초교파적인 대규모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10년에 들어서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의 기독교인을 14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로 추산했는데 이에 비추어 보면 100만 명이란 목표는 달성이 쉽지 않았다. 일제 측 보고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운동 기간을 상기(1910년 4~7월), 중기(1910년 8~11월), 하기(1910년 12월~1911년 3월)로 구분하고 각 기간에 14만 명의 교인들이 1명씩만 전도하면 상기에 28만 명, 중기에 56만 명, 하기에 112만 명의 신자를 얻을 수 있다는 계획을 세웠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이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최대 교파인 장로회에서는 이 해 9월 각 대리회로 하여금 특별위원을 선정하여 이 운동을 적극 추진케 하였다. 선교사들은 미국의 부흥사 채프만(J. W. Chapman)과 알렉산더(C. M. Alexander)를 초빙하여 부흥회를 인도케 했고, 일행인 데이비스(G. T. B. Davis)는 한국에 남아 각지를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서울에서는 교파와 계층을 초월한 대규모 전도단이 조직되어 순회전도에 나섰고, 지방에서도 전도단이 속속 조직되었다. 서울·평양 등지의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도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기간에 기독교인들은 연합기도회·매일기도회 개최, 호별 방문전도, 복음서 판매 등의 활동을 벌였는데, 수십만 권의 복음서와 수백만 장의 전도서가 각지에 배포되었다. 이밖에 물질적인 헌금과는 별도로 자신의 시간을 전도에 할애하는 ‘날 연보’(day-offering, 獻日)가 이 시기에 나타났는데 이는 유례가 없는 독특한 전도방법이었다. 평양 지역 1천 명 신자의 연 2만 2천 일의 날연보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10만 일의 날 연보가 기록되었다.

결과

초교파적인 대규모 부흥운동에도 불구하고 장로교·감리교 교세는 1911년 181,296명, 1912년 157,902명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10년에 견주면 겨우 현상유지를 한 수준이었다. 대구에서는 1천 명이 모인 부흥집회에서 5백 명이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으나 이후 50명만이 교회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이를 실패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100만 이상이 지난 1년 사이에 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블레어(W. N. Blair)의 평가처럼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 운동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했다. 특히 일제의 한국 병탄이란 격동기에 이 운동이 혼란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선교사들도 여럿이었다.

의의와 평가

100만 명 구령운동은 원산 부흥운동(1903)과 평양 대부흥운동(1907)과 함께 1900년대 3대 부흥운동으로 꼽히며 기독교 교세 성장에 나름대로 기여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국기독교 부흥운동의 원형이 이 시기에 거의 정립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의 한국 병탄을 전후한 시기 기독교인들의 비정치화·탈정치화를 촉진시키고 내세지향적·현실도피적 신앙형태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적 평가도 있다. 민족 언론인 『대한매일신보』의 논설(1910.4.5.)은 이 운동을 우려했으며, 일제가 이 운동을 탄압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도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의 역사』Ⅰ(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기독교문사, 2011)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박명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한국토착교회 형성사 연구』(이덕주,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개신교의 백만구령운동과 ‘한일합병’」Ⅱ(한규무, 『기독교사상』34-9, 1990)
「개신교의 백만구령운동과 ‘한일합병’」Ⅰ(한규무, 『기독교사상』34-8, 1990)
집필자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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