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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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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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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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외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종교인.
내용

구미의 기독교국가에서 비기독교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파견한 사람으로서 보통 목사이면서 선교사무의 처리도 맡아 하였다. 그러나 성직의 안수(按手)를 받지 않은 전문인도 의사·기술자·교사로서 선교사로 파송되기도 하였다.

문화적·사회적·종교적 전통이 전혀 다른 지역에서 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문화적 갈등을 빚거나 건강의 악화를 가져오는 일이 많았으며 평가도 근대화 추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에서부터 제국주의 확장에 앞잡이 구실을 하였다는 것에 이르는 양극단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내한 선교사들이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을 만큼 학교 교육, 의료사업 등에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에 대한 평가에는 부정적인 면도 함께 존재한다. 1907년 정미7조약의 체결로 일본이 한국 통치자로 군림하자 선교사들은 통치자쪽으로 기울어졌다.

즉, 선교 초기 한국 사회의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족운동이라는 과제 앞에서는 방관내지 일본 통치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는 일본의 선교사 회유책, 그리고 최대 선교사 파송국이었던 미국 언론의 부추김, 그리고 미국 선교 본부의 통제 등으로 한국인의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대한 선교사들의 역할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데 있다.

또한 일부 선교사들 가운데는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하여 광산 채굴, 철도 건설, 벌목 등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다. 물론 선교사 전체가 이와 같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일관된 것은 아니다.

고종의 친서를 품고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한국을 지원하고자 했던 헐버트(Hulbert,H.B.) 선교사나 1911년 105인 사건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에서 보였던 선교사들의 태도는 선교사들의 기본적인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사례들 중 일부이다.

이런 점에서 선교사들에 대한 평가는 총체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또한 어떻게 평가되든지 간에 현재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 그리고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미친 그들의 영향은 간과될 수 없다.

우리 나라에 공식적인 선교사 파송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Maclay,R.S.)의 한국 방문을 통해서였다.

그는 1884년 6월 24일에서 7월 8일까지 체류하면서, 이미 일본에서 친분을 쌓았던 김옥균의 협력 하에 고종으로부터 교육·의료활동에 대한 윤허를 받아냈다.

매클레이의 한국 방문을 통해 기독교는 교육과 의료를 통한 간접적인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 감리회 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선교사를 먼저 상륙시킨 것은 미국 북장로회였다.

1884년 9월 중국에 파송되었던 알렌(Allen,H.N., 安連)이 공사관 담당 의사의 신분으로 입국한 것을 계기로 다음 해인 1885년 4월에는 북감리교의 아펜젤러(Appenzeller,H.G.) 부부와 북장로교의 언더우드(Underwood,H.G.), 그리고 5월에는 북감리교의 스크랜턴(Scraton,W.B.)과 그의 모친이 입국했다.

그 뒤 1889년의 성공회, 호주 장로교·침례교, 1890년의 성공회, 1892년의 남장로교, 1895년의 남감리교, 1901년의 캐나다장로교 등이 계속 우리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신앙유형은 대개 청교도적인 엄격한 보수주의 신앙으로 경건주의, 정교분리, 성서지상주의를 기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이나 사회복음적 신앙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1918년 이후 선교부에서 사회·농촌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성직선교사들보다는 전문기술을 가진 선교사들을 선호하자 보수주의적 선교사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신학유형의 분열현상도 있다.

사회복음적 자유주의신학의 성향은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들에게 많았고 광복 이후 그들의 지도아래 한국신학대학과 기독교장로회가 결성되었다.

감리교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교육·문화선교와 산업선교에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다만, 서북지방의 북장로교와 영남지역의 호주장로교, 호남지역의 남장로교가 보수주의 신학경향을 계속 유지하였다.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의 효율성을 위해 담당 선교구역을 분할했는데 이를 교계예양(敎界禮讓)이라 한다. 1891년 캐나다교회의 함경도 및 간도, 북감리교의 평안도 일부와 황해도 남부, 남감리교의 경기도와 강원도, 북장로교의 남만주·평안도·황해도 분할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서울·평양과 같은 대도시는 분할하지 않았다.

1936년에는 이해관계가 얽혀 갈등이 일어나자 분할제를 철폐하였다. 선교사들의 연합활동에 대한 필요성은 초기부터 절감되고 있었다.

따라서 1889년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의 연합, 1893년 4개 장로교선교부의 선교공회의 설립, 1905년 장로교·감리교 선교사들의 대한복음주의선교공의회 결성, 그리고 1912년의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 설립으로 발전되었다.

그 밖에도 찬송가의 공동사용, ≪The Korea Mission Field≫와 같은 선교월간지의 간행, ≪기독신보 基督申報≫의 간행, 병원·학교 및 사회사업에서의 연합활동도 이루어졌다. 1920년대부터는 선교사들에 대한 불만이 나타나게 되어 1926년에 이르러 반선교사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평안도 순안에서 일어난 허시모(許時謨)사건, 서울에서 벌어졌던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자치사건, 구세군에서의 한국인 사관 등용요구, 장로교에서의 치리권이양요구, 감리교합동에 대한 지지요구 등 일련의 운동이 그런 것이었다.

이런 점은 한국교회가 자주적인 교회행정을 확보해나가려 했다는 증거이며, 이후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전도사업이나 목회보다도 기관사업에 치중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 여러 교파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그들의 신앙적 다양성이 한국교회 분열의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선교동역자’라는 말이 사용되면서 선교사들의 역할이 재정의되었고 동등한 협력자로서 한국교회내에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에는 복음위주의 미국계 선교사들의 진출로 신학(神學)이나 교회론(敎會論)은 강조되지 못하였다.

우리 전통문화 이해에서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의 양극적 면이 공존했고 한국 근대사에 끼친 영향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하였다. 1996년 현재 문화체육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교사는 개신교 500여 명, 천주교 400여 명에 이른다.

참고문헌

『한국개신교사』(백악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한국기독교의 역사』I(한국기독교사연구회, 기독교문사, 1989)
『한국기독교회사』(민경배,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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