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보는 1915년, 감리교, 장로교 교파 연합신문으로 창간된 한글 주간 신문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가 한국인에게는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 크램(W. G. Cram)의 명의로 『기독신보』를 창간하였고, 한국인도 주필, 편집 위원 등의 이름으로 경영 및 제작에 참여하였다. 7명의 선교사 사장을 거친 후 1933년 6월 28일 최초의 한국인 사장으로 전필순 목사가 선임되었으나, 이후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 끝에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1937년 8월 휴간 후 1938년 1월 폐간되었다.
『기독신보』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감리교, 장로교 주1 연합신문으로 창간된 한글 주간 신문이다. 원래의 명칭은 『긔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였다. 1897년 한글 주간 신문으로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죠션크리스도인회보』를,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그리스도신문』을 각각 창간 및 발행하였고, 이 두 신문은 통합과 분리를 거쳐 1915년 감리교, 장로교 교파 연합신문으로 『기독신보』로 다시 창간되었다.
일제강점기 초기 일제가 한국인에게는 신문 발행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 크램(W. G. Cram)의 명의로 『기독신보』를 창간하였다. 역대 사장은 선교사 크램, 게일, 밀러, 로즈, 홉스, 하디, 본윅이고, 1933년 6월 28일자 신문(지령 917호)부터 전필순이 최초의 한국인 사장으로 등장한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1933년 7월 4일자 보도에 따르면 전필순은 7월 1일 사장으로 취임했다. 일제로부터 발행 허가를 받기 위해 부득이 선교사가 사장을 맡았으나, 한국인을 공동 경영인으로 참여시켰다. 김필수는 주2이었으나 조선 사장으로 불리었다.
『기독신보』는 주3와 교회 관련 내용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적 뉴스도 보도하였다. 일제의 감시 때문에 종교 뉴스만 보도할 수밖에 없었으나, 1920년 2월 4일부터 시사 뉴스를 보도하게 되었다. 이날 사고에서 “금호(今號)브터는 時事를 記載ᄒᆞᄂᆞ이다”라고 공지하였다. 이후 해외 소식은 물론 일제를 비판하는 글도 가끔 보였고, 이런 영향으로 19차례에 걸쳐 신문 압수 조치를 당했다.
『기독신보』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경영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신문의 발행 주체인 재한복음주의선교회연합회와 조선예수교서회는 연례 보고서를 통해 해마다 독자 현황, 구독료와 광고료 등의 수입, 지출 내역, 운영상의 특이 사항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공개하였다. 『기독신보』는 감리교, 장로교의 교파 연합신문이어서 한국 교회 차원에서 구독 지원이 있었으나, 경영은 항상 적자였으며, 교단에서 이를 충당 및 지원하였다. 구독자 수는 평균 3천 명 안팎 수준이었다.
『기독신보』의 폐간 과정은 한국 교회 내 주도권 갈등에 따른 것이다. 최초의 한국인 사장이 된 전필순이 당시 장로교에서 이단으로 규정하고 감리교에서도 배척받던 적극신앙단에 대해 우호적 주4 태도를 나타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전필순은 독립 경영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이 신문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조선예수교서회와 경영권을 두고 정면 충돌하였다. 적극신앙단의 창단 멤버인 전필순이 『기독신보』의 사장에 선임될 정도로 이 신문의 주도권은 이미 적극신앙단 측으로 옮겨져 있었고, 이를 파악한 감리교, 장로교 교단에서는 『기독신보』에 대한 기대를 어느 정도 접고, 독자적인 교단 언론 매체를 창간하였다. 조선예수교서회는 적극신앙단과의 갈등과 싸움이 격화될 것을 막기 위해 전필순의 사장 임기를 연장했고, 전필순은 감리교, 장로교 교파 연합신문 『기독신보』를 자신의 개인 소유 신문으로 만들었다. 이후 찬조회 조직, 주식회사로의 전환, 주5 증설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한국 교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경영 악화를 견디지 못해 결국 폐간에 이르게 되었다. 1937년 7월 28일 지령 1129호를 끝으로 『기독신보』는 주6되었고, 6개월 정도의 휴간 기간을 거쳐 폐간을 맞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