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명칭은 『긔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였고, 최초의 편집진은 선교사인 크램(Cram, W. G.)과 케이블(Cable, E .M.), 그리고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던 김필수(金弼秀)였다.
신문의 발행권은 조선예수교서회가 가지고 있었으며, 비용은 찬송가 판매금과 원조금으로 충당하였다. 1919년에는 항일적인 논조로 인해 네 차례나 압수당하였고, 편집장 박동완(朴東完)은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을 받았다. 또한, 극심한 물가 폭등 등으로 매주 3천 부 이상을 발행하던 것이 2천부를 겨우 상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독자 확장운동을 벌여, 1920년에는 6천 부 이상을 발행하면서 계속하여 장로교와 감리교가 6:4의 비율로 책임 부수를 정하여 신문구독운동을 펴 나갔다.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초교파적으로 조직되었을 때, 『기독신보』를 예수교서회에서 연합공의회로 이관시켜 일간신문으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32년에는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연합공의회에서 확대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예수교서회측은 김관식(金觀植)을 이사장으로 하는 새 이사회를 구성하고 발행권의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필로 임명된 전필순(全弼淳)은 예수교서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경영체계를 세우고, 1933년 8월부터 새롭게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역대 사장은 크램·김필수·게일(Gale, J. S.)·하디(Hardie, R. A.)·로드스(Rhodes, H. A.)였고, 주필은 김필수·박동완·조상옥(趙尙玉)·박연서(朴淵瑞)·전필순 등이었다. 이 신문은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초교파적인 연합신문이며, 1937년에 폐간될 때까지 가장 수명이 길었던 교회신문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