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전반 기독교 개혁운동을 표방함과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단결정신을 함양하며 독립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적극신앙단의 설립이 본격화된 것은 1932년 6월경이었다. 1932년 4월 신흥우는 ‘히틀러가 적극기독교를 주장하여 기독교운동을 통해 게르만 민족의 대동단결을 꾀하고 기독교 청소년을 히틀러 청소년단으로 개편하여 민족 국가주의적 훈육 단련을 하여 독일 민족국가운동에 기여하게 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다 위축된 흥업구락부 운동을 계승하고, 기독교계 각종 문화단체의 주도권을 획득하여 ‘민족적 독립’을 지향한다는 생각에서 적극신앙단 결성을 추진하였다. 1932년 6월 중순 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적극신앙’의 취지에 동의하는 기독교계 인물들이 모여 적극신앙단이 결성되었다.
적극신앙단을 조직한 신흥우를 비롯한 주도 인물들은 새로운 생활 신앙 선언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21개조의 실천 강령을 구상하고, 보수적이지 않은 선교사들과 진보적인 교회 목사와 지도자들에게 이를 설명했다. 또한 당시 YMCA의 농업간사로 있던 윌버(H. A. Wilbur)의 주선으로 외국선교사들과 만나 자신들의 개혁구상을 밝히며 협조를 요청하였다.
참여 인물의 대부분은 1920년대부터 신흥우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로, 대개 기호지역 출신의 감리교와 장로교인들이었다. 이들은 미국 및 일본에서 신학과 인문학을 공부한 유학생들 출신들이었으며, 또한 3·1운동 이후 YMCA, 흥업구락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신간회 등 여러 민족·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었다.
이 단체는 당시 ‘관념적인 천국주의’만 부르짖는 기독교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부합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지닌 기독교로 전환해야 할 것과 이것을 위해 체계적인 기독교 개혁단체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신앙이 갖는 피안적이고 관념적인 소극적 태도를 비판하고 삶의 원동력으로서 우리의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현실 참여적인 모습을 ‘적극신앙선언 5개항’과 ‘생활개선을 위한 21개조’를 통해 제시하였다.
이를 단원들에게 카드로 만들어 배포하는 동시에 YMCA연합회를 통해 전국적인 적극신앙운동으로 추진했다. 적극신앙단의 확대를 위해 기독교계 내의 지부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재일YMCA 내에 적극신앙단 지부가 조직되기도 하였고, 감리교 내에서는 적극신앙의 이념을 띤 성경반이 설치·운영되기도 했다.
이 단체는 기독교운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종교의 이름 아래 동지를 모으고 독립사상을 갖게 하여 장래 조선 독립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민족의식의 양성”, “민족 체위(體位)의 향상”, “단결 정신의 함양과 훈련”, “산업의 발전과 경제의 독립”이란 단체의 목적에서도 보이는데, 이 단체가 경제운동을 통한 민족독립을 도모한다는 흥업구락부의 정신을 계승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기독교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적극신앙단에 대해 제도권 교회나 YMCA 내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는 적극신앙단이 진보주의적 기독교관을 중심으로 급진적이고 비밀결사체적 성격을 띠며 전개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였다. 이에 교계에서는 적극신앙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형성되었다. 또 YMCA 원로 김정식이 주도한 ‘재경기독교유지회’는 신흥우의 YMCA 총무 사임과 적극신앙단을 배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급기야는 적극신앙단이 국내 최대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부터 ‘인정불허’, ‘가입금지’라는 조처를 당했다.
1935년 1월 신흥우가 YMCA 총무직을 사퇴하고 YMCA 이사회에서 수리됨으로써 결국 YMCA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적극신앙단도 그 중심을 잃고 사실상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