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남 ()

개신교
인물
해방 이후 숭실대학교 초대 총장 ,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5년
사망 연도
1978년
본관
광주(廣州)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숭실대학교 초대 총장 ,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생애 및 활동사항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1905년 아버지 김찬희(金燦禧)와 어머니 이진희(李鎭禧)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서군은 평안도 지역에서 기독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신교육에 먼저 눈뜬 지역으로 김형남은 1911년 기독교계 학교인 명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9년 명신학교 중학과정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9월에 숭실대학에 입학했고, 대학 내 숭실학당 자조부(自助部) 기계창에서 학비를 벌면서 전문화된 기계와 도구들을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1924년 5월 숭실대학 2년을 수료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그 해 9월 미국 캔터키주 웨슬리안대학 화학과 3학년에 편입하였고, 1926년 6월에 졸업하였다. 유학 중 실리적인 과학과 응용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뉴욕의 프래트 공과대학 4학년에 편입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1930년 귀국한 지 3개월 만에 평양에서 친구와 함께 대동피혁사를 설립했으나, 경영 경험 부족과 대공황 여파 등이 겹쳐 3년만에 문을 닫았다. 1945년 8월 15일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받게 되자 월남하였다.

1948년 9월 미군정청 광공국에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적산기업인 종연방직(鍾淵紡織) 전남공장 관리직을 맡게 되었다. 6·25전쟁 중인 1951년 8월경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직접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기업 규모가 커지자 경영 분리와 함께 상호를 일신방직으로 변경하였는데, 이 기업은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면방업체로 발전하였다.

기업 활동과 함께 그는 평생 개척교회를 설립하거나 기독교계 기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숭실대학 상도동 교사 신축 때 기숙사를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76년 재단 이사, 이듬해에는 이사장으로 추대되면서 교육행정가로도 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에는 제8대 학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교육행정을 펼쳐 숭실대학의 중흥을 이끌었다.

1972년 숭실대학이 대전대학과 통합하여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1972년 숭전대학 초대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에는 임기를 3년이나 남긴 상태에서 이한빈 박사에게 총장직을 넘겨주고 재단이사장에 재취임하였다. 1977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고, 1978년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추모사진전)숭실 중흥의 大人, 김형남 총장』(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1)
『인물로 본 숭실 100년』(조요한, 숭실대학교, 1992)
『김형남전: 한알의 밀알』(김형남전기편찬위원회, 1985)
집필자
김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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