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 유학 또는 망명한 기독교 청년들을 중심으로 3·1운동 직후 설립된 고려기독교청년회는 안창호가 북경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독려에대한 강연을 한 후 이대위·이용설 등이 기독교청년회의 설립 필요성을 공감하여 설립하였다.
단체의 본부는 북경 동성(東城) 등시구(燈市口) 미국 공리회 교당이었다. 회장은 이용설이었고, 이대위·장자일·한영복 등이 간부로 활동하였다. 설립 다음해인 1921년부터 회원이 증가하였고, 북경 화북일보(華北日報) 기자로 활동하던 심천이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김하전은 운동부장, 한영복은 종교부장 겸 교육부장이었다.
1922년 1월 경, 북경 청화대학에서 만국학생청년회대회가 개최되었는데, 귀국했던 이대위가 이상재·신흥우·여운홍·김활란·김필례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고려기독교청년회는 국내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도산 안창호의 애국심 함양과 관련된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4년 3월 경 고려기독청년회는 국내 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 가입을 신청하였다. 이에 기독교청년회연합회는 조사원 3명을 선정하여 조사한 후 1924년 6월에 고려기독청년회를 정식 회원단체로 인정하였다.
또한 미국인과 중국인의 도움으로 ‘북경조선인기독교회’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위해 고려기독청년회는‘북경조선인기독회동사회’를 설치하고, 교회용 가옥의 마련과 전도사의 초빙 등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7월 북경 조양문대가(朝陽門大街) 314-1호에 북경조선인기독교회를 설립하였다. 한편 유학생을 위한 강습회를 개설하였고, 강연회도 진행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계몽활동이 아닌 독립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한국의 혈』이란 잡지를 발간하여, 안창호 등의 한국독립당 결성을 후원하였다.
고려기독교청년회의 회원들은 북경 지역의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의 기반을 넓혔고, 또한 민족운동 단체들에 활동공간을 대여함으로써 민족운동의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