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농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한학(漢學)을 공부하다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다. 이승만, 정교, 주시경, 오긍선, 신흥우 등과 함께 1898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1901년 전도인 활동을 하면서 배재학당 영어교사를 겸직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 내에 설립된 협성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하였다. 협성회는 학생들에게 충군 애국하는 마음을 세워 의기와 용맹을 키우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해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것을 전국 동포에게 전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매주 토요일 오후에 배재학당에 모여 공개토론회를 진행했는데, 노병선은 이 토론회의 주요 연사로 활약하였다.
1897년 5월 5일 설립된 한국기독교 최초의 청년조직인 웹윗청년회 창립위원으로 중앙본부 임원을 맡아 각 교회에 웹윗청년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는데 노력했다. 또한 그 해 10월 31일에 결성된 정동교회 남자 웹윗청년회 월은지회에서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웹윗청년회 중앙본부의 통신국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897년부터 정동교회 본처 전도인으로 선임된 후 1901년까지 동대문교회에 설교자로 파송 받아 활동하였다. 1902년에는 정동교회에 아펜젤러(A. R. Appenzeller)와 함께 파송되었고, 그 해 6월 아펜젤러의 순직 이후에는 1903년 4월까지 실질적인 정동교회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03년부터는 스크랜턴(W. B. Scranton)의 조사로 남부지역을 다니며 전도하였는데, 당시 감리교회가 활발하게 진행하던 매일학교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지도하였다. 1906년에는 상동교회 공옥학교 교사로 활동하였다. 1907년 이후에는 감리교 연회록에서 노병선에 대한 보고가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시기에 부인과 사별한 후 평양에 거주하며 광성(光成)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30년대에는 서울 창천동으로 이사하여 창천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는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고 창씨개명도 거부하였다. 1941년 1월 7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897년에 그가 저술한 『파혹진션론』은 16쪽 분량의소책자지만, 기독교를 동양의 도와 서양의 도를 아우르는 '하늘의 도'로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개신교 최초의 기독교 변증서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