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냉전과 분단 속에서 좌우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좌익진영에서 속한 유일한 기독교단체로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을 확대하고 강화 향상하기 위해 기독교민주동맹이 설립되었다.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 목사가 중심이 된 이 단체는 기독교 단체임에도 다른 종교 건물인 시천교 교당에서 결성식을 치러야 했을 뿐 아니라, 결성식장에 교회 청년들과 우익단체 청년들이 습격하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표는 김창준으로, 그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해방 후 좌우합작에 노력하던 중 10·1대구사건을 겪으며 좌익계 통일전선 조직인 민전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민전 공동의장 겸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2월에는 기독교민주동맹을 출범시키면서 교계의 좌익 세력을 대표했다.
미군정과 단정수립을 비판하며 통일된 국가 재건을 주장했기 때문에 교회는 기독교민주동맹을 ‘이단아’ 취급했으나, 좌익 쪽에서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사명인 진정한 인류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민주건국에 몸을 던지는 기독교의 토대가 되려고 반그리스도교적 반민주적인 것에 대한 과감한 투쟁을 개시할 것을 선언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기독교민주동맹 선언에서 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선언 내용은 서두에서 친일, 반민족적 교회 지도자들을 규탄한 다음, 신탁통치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며, “인민적 민주주의 건설”의 참여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단체의 결성 직전부터 김창준은 3상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것만이 조국독립을 위하여 옳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런 입장이 기독교민주동맹 선언에도 반영된 것이었다. 이처럼 좌익단체인 민전에 참여하는 기독교민주동맹은 근로인민대중에 기초한 국가건설을 추진하고자 했는데, 김창준은 이것을 십자가 사랑의 구체화이며 기독교 본래의 사회정신 실현으로 보았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기독교민주동맹 대표로 김창준이 참석하였고,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차 평양에 간 후 김창준은 평양에 남아 북한의 사회주의 사회건설에 참여하였다. 이후 기독교민주동맹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지하 활동을 계속하다 1949년 10월 정부의 등록취소 처분을 받아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