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의 설립은 YMCA 총무 신흥우가 몇 차례 미국 여행 중에 이승만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1925년 12월에 개최된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의 영향도 단체 설립에 크게 작용하였다.
1920년대 전반부터 “조선인의 사업은 조선인 자체가 경영 유지해야 하고, 조선인의 사업은 조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신흥우는 1926년 2월 ‘기독교 개혁’이란 취지에 동조하는 인물들과 함께 기독교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중앙위원은 신흥우, 김활란, 박동완, 박희도, 유각경, 홍병덕, 홍종숙 등이었다. 연구회에서는 기독교의 민중화, 생활의 간소화, 산업기관의 시설, 조선적 기독교의 설립 등에 관한 것을 논의했다. 동년 4월에는 기독교를 민중적 표준, 실제 생활의 간이화, 산업기관의 시설, 조선적 교회 등 4대 목표를 설정하였고, 이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착수하였다.
이와 관련해 신흥우는 지금은 ‘개조’를 구호나 사상운동으로서가 아니라 구체화하여 실현하는데 노력해야 할 때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조직을 모방하여 문명국의 종교를 미개국에 전파하는 방식의 기존 외국선교사업의 방향을 전환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걸맞게 교리해석과 신조유지, 노동과 자본, 이성과 결혼, 계급과 인종 제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을 정리하여 종교개조에 착수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대회의 주된 토론 주제이기도 하였다.
기독교연구회의 활동은 1926년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 피어선성경학원에서 개최된 제5회 YMCA 연합회 정기 대회의 의제(議題)로 상정되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29일 개최된 본회의에서는 ‘교화 진흥의 건’이란 주제 아래 ①1927년에는 평신도로 하여금 조선 교회의 큰 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현재의 배 이상의 신자를 얻도록 힘쓸 것, ② 교파를 통일케 하도록 힘쓸 것, ③ 교회를 조선적 정신의 교회로 이루도록 노력할 것, ④ 교화 진흥 연구 위원 선정의 건, ⑤ 준회원 대회 개회의 건 등의 5건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기독교연구회의 목표는 YMCA 연합회 전국대회를 거쳐 전국적인 YMCA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기독교연구회의 정확한 해체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32년 6월 적극신앙단이 조직될 당시 기독교연구회의 주요 멤버들이 참여하였고, 이들이 적극신앙단에 흡수통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