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독교운동 ()

개신교
사건
3·1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이 종교 비판론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반제국주의 ·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며 기독교를 배척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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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3·1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이 종교 비판론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반제국주의 · 반자본주의를 표방하며 기독교를 배척한 운동.
개설

19세기 말 한국 사회에 수용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초기부터 있었으나, 이념적이고 집단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것은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이었다.

역사적 배경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 도처에서 유행하게 된 사회주의가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 변화와 더불어 짧은 기간에 청년지식인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이는 그동안 교육·의료 등의 사업을 통해 근대적 문화의 선도자로 자처하던 기독교 내부의 동요와 균열 현상을 낳게 하는 큰 배경이 되었다.

1923년 3월에 일어난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국내 언론에 소개되었고, 이는 중국혁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에게 반기독교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회주의자들은 1923년에 개최된 청년당대회에서 민족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종교는 미신과 허위’라는 반종교 강령을 채택하고 국내에서의 반종교운동을 공식화하였다.

경과

1925년에 들어서면서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독교를 배척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 세력의 하나인 화요파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통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결성을 계획하였다. 바로 이 대회에서 반종교 강령이 채택되었고, 그 대상으로 ‘기독교’가 지목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차원에서 ‘기독교’를 배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것은 이제부터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를 이념적·집단적인 배척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의미하였다.

1925년 10월 25~26일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표면단체’인 한양청년동맹은 ‘반기독교대회’와 ‘반기독교강연회’의 개최를 계획하였다. 이 집회들은 한양청년동맹이 1925년 10월 21일 서울에서 열 예정이었던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주일학교대회가 예정대로 개최된 반면에 한양청년연맹의 집회는 경찰에 의해 강제로 금지되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한국의 기독교가 ‘제국주의’를 유지하고 옹호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것이 일제와 기독교가 밀착된 증거라고 공격하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말부터 1926년 중반까지 전국에 걸쳐 절정을 이루며 발생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반기독교 강연회와 토론회가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 간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충돌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조직에 대해 배척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면서도 기독교 민족주의자들과의 민족협동전선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사회주의자들은 1926년 초반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 논의에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참여시키고 있었으며, 이에 더 이상의 기독교 배척운동이 민족협동전선 논의에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반기독교운동을 철회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협동전선론이 구체화되는 1926년 중반이 되면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도 퇴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1926년 중반부터 그 동안 중단되었던 반기독교운동은 국제적으로 일어난 세계대공황, 사회주의자들의 제6차 코민테른에서 제기된 ‘계급 대 계급’ 전술,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이후 사회주의자들에게 형성되었던 ‘혁명적 시기론’이 결합되면서 다시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단체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규정하며 배척운동을 하였다. 특히 이전까지 ‘통일전선’의 주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었던 ‘천도교’에 대해서도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사회주의자들은 주로 종교 본질 자체에 대해 이론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종교 자체를 현실적으로 거부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는 일정한 물질적 사회적 근거로 하고 그 곳에 환상적으로 산출된 것이지만, 그 물질적·사회적 근거가 제거되더라도 기계적으로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 사회주의의 건설과 같이 건실한 반종교운동투쟁을 통해서 점차 소멸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와 함께 “최근 종교집단이 민족개량주의의 정치적 도당으로 전화”되었다는 정치적 이유에서도 배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과

193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반제통일전선’ 차원에서 종교에 대한 유화적 태도를 포함하고 있는 ‘반제인민민주전선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제 사회주의운동노선의 변화가 국내에 적극 수용됨에 따라 1930년대 중반 이후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일제에 맞서 종교적 차이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민족연합전선’이 지향되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이 종교단체와의 직접적인 연합을 주장하거나, 실제 로 천도교 일부 세력과의 제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참고문헌

「1920년대 민족협동전선과 반기독교운동」『한국 근현대사 연구』72(김명숙, 2015)
집필자
김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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