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9세 때 안질을 앓아 맹인이 되었다. 생계를 위해 점치는 법을 배웠는데, 15세에 복술선생으로부터 ‘산통’(算筒)과 ‘죽장’(竹杖)을 물려받고 복술가가 되었다. 눈치가 빠르고 말재주가 능했던 그는 평양에서 자신감을 얻고 서울, 이천, 원주를 거쳐, 서울 근교 고양읍에 자리를 잡았고, ‘명복’(名卜)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눈치로 점을 치는데 한계를 느낀 그는 ‘도’(道)를 구하기 위해 나름의 종교적 수행을 시작하였다. 마지막 수단으로 백일 철야 기도에 들어갔고, 1897년 1월 12일 아침, 전도를 위해 집을 찾은 남감리회 매서인 김제옥(金濟玉)으로부터 『인가귀도(引家歸道)』라는 전도책자를 받게 되었다. 당시 그는 기독교를 ‘사교’(邪敎)로 여겨 이 책자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후 꿈속에서 하늘나라에 올라간 그가 ‘예수’로부터 ‘의’(義)의 산통을 받고 이름 모를 인물로부터 빈 산통을 받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면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였다. 아내와 함께 고양읍교회에 처음 출석하던 날, 그는 자신이 사용하던 북과 산통을 선교사에게 기증하였다. 1897년 5월 2일 고양읍교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1899년부터 전도인에 임명된 그는 리드(李德) 선교사와 함께 개성으로 파견되어 개성, 장단 등지에서 13년간 전도활동을 펼쳤다. 이외에도 그의 활동 범위는 철원, 김화, 평양, 사리원, 풍덕, 나주, 평강 등으로 광범위하였고, 장단읍교회 · 감암리교회 · 개성남부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감리교의 양주삼은 그를 ‘한국의 삭개오’로 불렀고, 성결교의 박소천은 1938년 그의 신앙생활 40년을 기념하여 전기집 『숨은 보배』를 출판하였다. 회심행도가(回心行道歌) 등 49종의 노래 가사와 20여 종의 설교 필기를 남긴 그는 한국기독교 초기 전설적 전도인으로 널리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