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 ()

개신교
인물
해방 이후 자교교회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연회장, 배화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90년
본관
안동(安東)
출생지
경기도 부천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자교교회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연회장, 배화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 경기도 부천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성모(金聖模), 어머니는 정보물(鄭寶物)이고, 4남 3녀 중 장남이다. 증조부 때 대원군의 안동 김씨 박해로 덕적도로 옮겨가 정착하게 되었다.

덕적도 명신(明信)학교와 명덕(明德)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1925년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로 유학을 떠났으나 병으로 중도에 포기하고 귀국하여 명덕학교 교사생활을 하였다. 학교 교사 권유로 감리교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25세 때 감리교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건강 문제로 중단하였다가 1937년 3월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교회로 파송을 받아 농촌 목회를 하였고, 1940년부터 서울 원동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한국 교회를 일본 교회에 병합시키려는 교파 합동 반대 운동을 펼치다 원동교회에서 쫓겨났고 목사직도 박탈당했다.

해방 직후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연원을 둔 단체를 '조선기독교단'으로 이름을 바꿔, 1945년 9월 8일 남부대회를 소집하려 하자 이를 비판하며 감리교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감리교의 통합운동을 주도하여 1949년 4월 29일 기독교대한감리회 통합 총회를 개최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였다.

청파교회에서 목회를 다시 시작한 그는 자교교회에서 1963년까지 6년간 목회하였고, 1963년에는 한국감리교회 모교회인 정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파송을 받고 1972년 5월 65세로 자원 은퇴할 때까지 시무하였다. 교단 행정가로도 활약하였는데, 1948년 인천지방 감리사가 되었고, 1949년에서 1950년까지 총리원 교육국·전도국·사회국 총무로 일했다. 1967년에는 감리교회 중부연회 연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외에도 1952년부터 1960년까지 배화학원 이사 및 이사장, 연세대학 이사, 이화학원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는 국제대학 학장으로 활동하였다.

은퇴 후 이촌동 지역에 한강중앙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다 1979년 1월 미국 이민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 우드랜드 지역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였다.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다 1990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84년에 쓴 회고록 『나의 목회 반세기』는 일제 말기 및 해방 후 감리교회 역사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감리교백년』(김광우, 전망사, 1990)
『나는 무엇을 하고 80 고개를 넘으려 하는 가』(김광우, 경향문화사, 1986)
『나의 목회 반세기』(김광우, 바울서신사, 1984)
집필자
김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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