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교회 조직이 재건되고 있었지만, 1945년 11월 23일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까지 교계 차원의 조직적인 건국운동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었다. 해방 후 자주 독립국가 건설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수의 교회 지도자, 특히 평신도들은 기독교계보다는 거국적 차원에서 건국준비위원회나 한민당·국민당을 비롯한 정당·사회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남부대회를 계기로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띤 2개의 단체, 즉 기독교신민회와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가 탄생하였고, 이후 친이승만 계열의 교계 지도자로 배은희·함태영·이규갑·이윤영·김활란·임영신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1946년 6월 3일 이른바 정읍 발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구상을 밝힌 이승만은 우익 최대의 대중조직인 독립촉성국민회의 기반 조직을 장악하고, 이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해, 한민당과 함께 ‘자율정부 수립운동’-‘남한 단독정부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이어서 그는 12월 미국에 가서 한반도 문제의 유엔 상정과 남조선과도정부(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한 뒤, 1947년 7월 한국 민족대표자 대회를 소집하여 남한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본격화했다. 이때 장로교 목사 배은희는 한국 민족대표자 대회 회장을 맡아 이승만의 단정 노선을 관철하는 데 앞장섰으며, 정부수립 초기 대한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국내에 별다른 지지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기독교 세력을 중시했는데, 1947년 7월 출범한 그리스도교연맹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는 기독교 정치사회 조직이었다. 그리스도교연맹은 위원장 함태영과 남상철·김활란·배은희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는데, 김구를 지지했던 천주교 측의 남상철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승만 지지자였다.
이 연맹은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적 진로를 확립하고 전 민족적 통일과 자주독립에 기여하기 위해 “교파를 초월하여 총집결로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봉사함”, “기독 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승등적 평형을 위하여 봉사함”, “세계 형제주의로서 국제친선과 평화를 위하여 봉사함” 등을 단체 강령으로 표방하였다.
그리스도교연맹의 해체일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