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수는 일제강점기 중앙여자청년동맹, 근우회 등에서 활동하고, 태평양노동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26년 12월 서울 낙원동에서 중앙여자청년동맹에 참여하였고, 1928년 7월에는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후 수차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1933년 5월부터 흥남, 함흥 등지를 중심으로 태평양노동조합운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참여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05년 4월 21일 경상남도 김해군 김해읍 지내리(池內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찬해(金灿海) · 김찬해(金燦海) · 박혜숙(朴惠淑) · 최성려 · 재노반 · 치야노파이다.
상경하여 1922년 천도교가 운영하는 동덕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교원 권태희(權泰熙)로부터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6년 졸업 후 모교에서 1928년까지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이자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쓰고 있던 고광수(高光洙)의 지도를 받아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비밀 지하 단체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독서회와 웅변 모임 등을 조직하였고, 1928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 학생부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1926년 12월 5일 서울 낙원동에서 결성된 중앙여자청년동맹에 참여하였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은 ‘무산계급의 승리 및 여성해방을 위해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치로 내걸었다.
1927년 5월 조직된 근우회에 가입하였고, 1928년 2월 근우회 경성지회 서무부 위원으로, 그해 7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그는 제3차 조선공산당에도 입당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파악하고, 조선 사회의 정세에 기초한 혁명적 인민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며, 조선에 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좌익 소아병적 견해이고 부르조아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은 우경적 견해라며 비판하였다. 당시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슬로건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1928년 10월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반에 입학하였다. 1929년 그곳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구역국 위원 겸 고려공청 동만구역국 청년부장을 지낸 임민호(林民鎬)와 결혼하였다. 1932년 5월, 그들은 대학 졸업 후 모스크바 교외의 우제르나 휴양소에서 국제 노동운동 문제와 지하 공작에 관련한 기술과 지식 등을 익혔다. 그들은 그해 9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함흥 · 흥남 지구에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받고, 1933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함흥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그해 5월부터 태평양노동조합 활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흥남화학노동조합 세포 조직, 흥원통조림공장 지도 그룹 등을 조직하였다.
1935년 3월 이들은 3·1운동 14주년을 기념하여 격문을 살포하다가 체포되었다. 1935년 6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김필수는 징역 3년 6개월을, 임민호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9년 출옥한 김필수는 1940년 9월 임민호가 석방되자, 함께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과 둔화현[敦化縣]으로 건너가 토목회사 동광조(東光組) 허룽현 출장소와 둔화현 목재채벌소에서 일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힘썼다.
일제 패망 후 1945년 8월 19일 소련군이 둔화에 들어왔으며, 9월 20일 둔화영화관에서 둔화현 민중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김필수는 이때 민주해방동맹 산하 여성해방동맹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지린으로 들어가 부녀동맹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9년 12월 중국공산당 연변지방공작위원회 부녀공작위원회 부서기로 임명되었다. 1952년 9월부터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부련회 주임으로서 부녀사업을 펼쳤다. 1955년 5월에는 연변사범학교 제1부 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0년 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정처 부처장, 시찰실 시찰원 등을 역임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 ‘반역자’, ‘소련 특무’라며 박해를 받았고, 1972년 11월 23일 사망하였다.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