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애시덕은 일제강점기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13년 교사들과 함께 비밀결사 송죽회를 조직하였다. 1918년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고, 귀국 후에는 3·1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를 파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김마리아 등과 함께 1919년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고 총무를 맡았다. 1929년부터는 농촌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892년 4월 19일 평양 외성에서 한의사 황석청과 전도부인 홍유례 사이의 2남 6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호는 송산(松山)이고, 이명은 황에스터(황Esther), 황에스더, 황애덕(黃愛德) 등이다.
6세 때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에스더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평양 정진소학교에서 수학한 후 상경하여 이화학당 중등과에 입학하였고, 신마실라, 박인덕, 김활란 등과 애국여성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졸업 후 고향에 내려가 숭의여학교 교원이 되었으며, 동료 김경희, 안정석 등과 함께 교내에서 비밀결사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였다. 회원은 주로 여학생들로 30여 명에 달하였다. 그의 방에 모여 단심가를 애송하거나 학교 지하실 혹은 회원 집에서 구국 기도회를 가졌으며, 국산품 애용이나 물자 절약 등 부녀 계몽 활동도 펼쳤다.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때에도 김마리아, 나혜석, 정자영 등 유학생들과 송죽회를 조직하여 기도회를 가지거나 국산애용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남학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2·8독립선언을 준비하였는데, 황애시덕을 비롯한 김마리아, 현덕식, 정자영, 유영준, 나혜석, 노영근, 성목진 등도 이에 동참하였다. 주동 학생으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에 와서 민족 지도자들을 만난 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또한 평양에 가서 파리강화회의에 여성 대표를 파견할 자금을 마련하고자 분주히 움직였다. 어느 정도 자금을 확보한 뒤 상경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1919년 3월 19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예심 면소로 풀려났다.
이후 영구적인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고자 김마리아, 이혜경 등과 함께 1919년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새롭게 정비하고 총무로 선임되었다. 송죽회 회원들과 접촉하여 회원 수를 늘려가는 한편, 정신여학교 지하실에 모여 활동을 모의하였다.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송금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11월 애국부인회가 탄로 나는 바람에 다른 간부 8명과 함께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고, 졸업 후 사감 겸 교원이 되었다. 1925년 여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시리커즈 대학과 콜롬비아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928년 콜롬비아 대학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피폐해진 한국 농촌을 살리겠다는 마음에서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에서 농촌 사업을 연구하고 1929년 1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협성여자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농촌사업지도교육과를 개설하고 김노득과 최용신 등을 길러냈다.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조선YWCA연합회 농촌부 간사로서 농촌 사업을 주도하였다. 특히 황해도 수안군 용현리에 내려가 이상촌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30년 박순보를 만나 결혼하였고, 1935년 남편과 함께 북만주로 건너가 칭청현[慶城縣]에 신개척 농장을 만들고 교회도 설립하였다. 하지만 1937년 7월 중일전쟁,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전시동원체제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서울 근교 광주(廣州) 백현리에 농장을 열었다. 그런데 일제가 식량까지 빼앗아 가자, 이를 지키고자 곡식으로 떡, 엿, 두부를 만들어 소비하는가 하면, 낮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밤에는 젊은 남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 지식인이 일제의 회유와 위협에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그는 자신의 농토를 전부 소작인에게 나누어주고 상경하여 재건운동을 시작하였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에는 고아, 부상자 등을 후원하는 복지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1년 8월 24일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