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월 13일 평안북도 강계군 이서면(吏西面) 등공리(登公里)에서 태어났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해 3월 말 한때 일진회 회원이었던 전협(全協), 최익환(崔益煥) 등이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각계 인사들로 민족 대단결을 이루고,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이에 김찬규(金燦奎), 박영효(朴泳孝), 김가진(金嘉鎭), 민영달(閔泳達) 등이 가담하였고, 그해 4월경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평안 지역 및 만주 안둥현[安東縣]에 지부를 설치하고 단원과 자금을 모집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1919년 10월 초순경 본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上海]로 이전하기로 하고, 의친왕(義親王) 망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그해 10월 10일 김가진이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하였고, 안창호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움직임이 일본 경찰에게 사전 탐지되어 11월 11일 의친왕 일행이 만주 안동역(安東驛)에서 붙잡혔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편, 조선민족대동단은 만세시위도 추진하였다. 1919년 10월경 조선민족대동단에 입단한 이신애(李信愛)는 부인 대표자로서 이에 동참할 여성 동지를 규합하였는데, 김종진도 동참하였다. 이신애 등은 그해 11월 25일 선언서 수백 매를 인쇄하고, 11월 27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서울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전에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11월 27일 밤, 이신애, 정규식(鄭奎植), 박원식, 나창헌(羅昌憲) 등은 김종진의 집에 모여 논의한 끝에 다음 날 오후 4시 30분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앞 광장에서 시위를 거행하기로 약속하였다.
약속한 1919년 11월 28일 오후에 이신애, 정규식, 박원식 등은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날 오후 4시 반경 김종진은 안국동 광장에 나갔다. 이후 이신애와 정규식 등이 깃발을 흔들며 앞장서자, 김종진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1백여 명으로 늘어나 기세를 올렸지만, 이내 김종진을 비롯한 주도자들이 안국동주재소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김종진은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및 출판법,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62년 3월 11일 사망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