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동단, 조선민흥회 등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신간회 출판부 간사로 활동한 관료·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1909년 서천군 재무주사로 재직 중에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활동했던 과오를 반성하고, 3,000여 원을 탈취하여 국외로 망명하려다가 체포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감형되어 5년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5년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 등지를 떠돌며 독립운동의 기회만를 엿보았다. 그런데 1917년부터 세계의 정세가 급변하자 1918년 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각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을 규합하여 민족의 의지를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 등에게 알려 그들로부터 원조를 받아 독립을 이룰 목적으로 1919년 3월말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김찬규(金燦奎)를 포함한 유림들 뿐만 아니라, 청년층과 노동자층을 주된 대상으로 가입시켜 회원 확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고 각종 독립문서의 작성 및 배포를 통해 대동단의 조직을 정비하였고, 대동단원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도모하였다. 그 뒤 동년 6월 초 소위 ‘대동단사건’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1926년 10월 대동단의 동지 권태석(權泰錫), 명제세(明濟世) 등과 함께 각 계급을 망라한 민족적 유일기관으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조직하고, 상무위원에 선임되어 민족연합전선의 결성에 주력하였다.
또한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될 때, 규칙심사위원 및 출판부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만주로 건너가 광복단(光復團)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귀국하여 1년간 경찰에 구금되었다.
1944년 대고려재건당(大高麗再建黨)을 조직하려다가 체포되었으며, 1945년 다시 인민정치당을 조직하려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1945년 한독당 중앙상무위원에 피선되었으며, 1946년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 동 대표의 자격으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의 최고정무위원(最高政務委員)에 피선되었으며,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에 선임되었다.
6·25전쟁 중에는 휴전협상을 위해 애쓰다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57년 민주혁신당(民主革新黨)의 통제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59년 7월 21일 동대문구 돈암동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 『대동단실기』(신복룡, 선인, 2003)
- 『대한민국 국회50년사』(국회, 1998)
- 『한국전쟁과 휴전 체제』(집문당, 1997)
- 『독립유공자공훈록』7(국가보훈처, 1990)
- 『한국공산주의운동사』신판 3권(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 「大同團事件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21)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