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혁신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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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상일 등 혁신계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진보정당.
이칭
이칭
민혁당(民革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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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57년 서상일 등 혁신계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한 진보정당.
연원 및 변천

1956년 5월 15일 정·부통령선거 후 정계는 보수와 혁신의 대립을 비롯하여 각 세력간에 혼란을 빚고 있었다.

보수세력의 자유당 내부에는 주류와 비주류가, 야당인 민주당 내에는 구 민국당과 흥사단, 그리고 혁신세력은 서상일(徐相日)·조봉암(曺奉岩)의 진보당계, 민주사회당의 무정부주의인 정화암(鄭華岩), 민족자주연맹의 구 중간파인 조헌식(趙憲植), 근로인민당계의 사회당운동에 가담하였던 김창숙(金昌淑), 비자유·비민주 측면의 김홍식(金洪植) 등의 준사회당운동 등이 대표적 양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진보세력들은 대동단결운동의 결과, 1957년 10월 15일 서상일을 중심으로 이 당을 결성하여 1960년대까지 존립하였다.

진보당추진위원회(조봉암·서상일 중심), 공화당 존속파와 조선민족청년단의 잔류 간부간에 합의된 민주혁신운동의 3대원칙(반공통일 재건에 효과적인 경제정책, 비보수, 원내세력에 의한 추진)을 내걸고, 민주혁신당 추진 12인위원회가 신당결성을 추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서상일·조봉암·김홍식·조헌식 등은 5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은 다시 그 위원회를 확대하여 신당창당을 위한 7인연락협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56년 10월 2일서상일과 조봉암 간의 이념상의 대립에 따라 진보당계가 7인연락협의회로부터 철수하면서 반대 입장을 나타내어 분열되었고, 민혁당 창당준비위원회는 계속 신당결성을 추진하여, 1956년 11월 8일 우파 사회주의자 서상일·김성숙(金星淑)·이동화(李東華)·고정훈(高貞勳)·장건상(張建相) 등 44명이 중심이 되어 창단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그 위원회의 구성문제 때문에 서상일과 장건상간의 근로인민당계와 비근로인민당계로 분립되어, 장건상은 진보당 쪽으로 기울어 민주혁신당 창당준비위원회의 이탈파가 되었다. 그리고 서상일중심의 민주혁신당창당준비위원회파는 1957년 10월 15일 555명(596명 중)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결당대회를 개최하였다.

민주혁신당의 당기구는 상임집행 최고기관으로 정치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간사장과 그 산하에 당무·조직·선전의 3국과 15부서를 설치하고, 그 밖에 통제·재정·정책·국회대책·선거대책 등 5개 위원회와 고문회의 등을 두었다.

그리고 강령은 공산독재·관료압제·자본전제·기타 일체의 부패세력의 배격과 내각책임제 실시, 민족자본의 육성으로 복지사회의 실현, 방위태세의 확립과 민주방식에 의한 조국통일의 완수, 호혜원칙에 의한 우방과의 외교강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59년 11월 20일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가 민주혁신당은 정당 등록이 될 수 없다고 밝혔고, 장택상(張澤相)이 재야 비보수계 군소정당 등을 규합, 1960년 2월 2일 반독재민주수호연맹을 결성함에 따라 민주혁신당도 여기에 동조하여 1960년 자유당의 마지막 선거인 3·15정부통령선거를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정당사』(한태수, 신태양사, 1961)
『한국정당발달사』(이기하, 의회정치사, 1961)
『해방삼십년사』 2(김운태, 성문각, 1976)
집필자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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