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혁규(赫奎)·보량(普亮). 자는 사협(士夾), 호는 석연(石然). 경상북도 영주 출신.
한말에 비서승(祕書丞) 등의 관직을 지냈는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사직하였다. 1919년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도한 대동단(大同團) 결성에 참여하여 주로 상류층 인사들을 규합하는 책임을 맡아 김가진(金嘉鎭)·민영달(閔泳達) 등과 교제를 통하여 조직 강화에 힘썼다.
한편, 1920년 가을에는 신태식(申泰植)과 함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연락하며 독립군 활동에 협조할 목적으로, 경상도 지방에 의용단을 조직하고 경상남도 단장에 취임하여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8월 평안남도 제3부청사 폭탄투척사건으로 의용단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그 뒤 근거지를 만주로 옮긴 다음 국경을 내왕하면서 활약하였다.
1922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독판인 이상룡(李相龍)의 밀령으로 군자금 수금을 위하여 입국, 활동하다가 같은 해 6월 경상북도 문경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하여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여 상해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의 명의로 된 지령문을 인쇄하여 경상남도 밀양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5년 2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