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흥회는 1926년 7월 8일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발기한 민족협동전선단체이다.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전진회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민족당주비회(民族黨籌備會)에 참여하면서 국내의 협동전선을 위한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발기하였다. 한국 내의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대한 열망과 해외민족유일당운동, 코민테른 노선 변화라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민족주의 좌파와 조선공산당 및 그 관련 단체가 참여하지 않은 제한된 규모의 협동전선이었기 때문에 발기인대회에서 신간회와 합치자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신간회에 흡수되었다.
다수의 민족주의 좌파와 조선공산당 및 그 관련 단체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제한된 규모로 조직된 협동전선이었다. 또한 창립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은 선출되었지만 창립총회를 금지당해 구체적인 활동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목표와 조직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의 많은 부분이 명실상부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에 수용되었다.
1926년 초 한국 사회 공산주의 진영은 크게 보아 4단체 합동위원회( 화요회 · 북풍회 · 조선노동당 · 조선무산자동맹의 합동 단체로, 사실상 조선공산당 표면의 단체이다.)와 전진회(前進會 :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의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 전진회는 1926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민족당주비회(民族黨籌備會)에 참여하였다.
민족당주비회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형성을 둘러싸고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 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이 동일한 운동노선을 취함으로써 생겨난 조직적 연계성을 바탕으로 결성될 수 있었다. 이 민족당주비회는 상해임시정부의 창조파 일부, 이르쿠츠크파, 상해파 일부, 신민부(新民府) 일파, 독자적 세력인 김경천(金擎天) · 김규식(金奎植) 등의 연합이었다.
민족당주비회 인물들은 국내 운동세력과의 연합도 꾀하였는데, 여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 전진회였다. 전진회에서는 김영만(金榮萬) · 최창익(崔昌益)을 파견하여 민족당주비회의 결성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따라서 서울청년회는 민족당주비회를 통해 해외의 민족해방 투쟁세력과 연관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히 이에 대응되는 국내의 협동전선을 위한 조직적 강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서울청년회는 민족당주비회와의 일정한 관계 아래 조선민흥회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민족당주비회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아 성립된 단체이므로 조선민흥회의 발기 역시 코민테른의 영향이 어느 정도는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코민테른 제4회 대회(1922.11.5∼1922.12.5)에서 채택된 ‘동양 문제에 관한 일반적 테제’는 최초의 반제(反帝) · 반봉건(反封建) 연합전선을 제시하였지만 민족혁명의 수행과 계급적 독자성을 동시의 과제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1925년에 발표된 코민테른의 ‘한국 문제에 대한 의정서’에서는 ‘중국의 국민당과 같은 민족적 혁명당을 건설할 것’과 ‘이 임무는 공산당의 명의로 할 필요가 없는 조선의 독립 획득이라는 슬로건 밑에서 행해질 필요가 있음’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조선민흥회의 발기에는 한국 내의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대한 열망과 움직임, 해외민족유일당운동, 코민테른 노선 변화라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조선민흥회는 1926년 7월 8일 발기 이후 그 해 11월 29명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이 선출되었다.
준비위원은 명제세(明濟世) · 송내호(宋乃浩) · 서세충(徐世忠) · 심상문(沈相文) · 장인환(張仁煥) · 주익(朱翼) · 신현익(申鉉翼) · 강학동(姜鶴東) · 명이항(明以恒) · 명용준(明容俊) · 이경호(李京鎬) · 정순영(鄭舜永) · 이창환(李昌煥) · 배헌(裵憲) · 김상규(金商圭) · 김연중(金演重) · 정춘수(鄭春洙) · 오화영(吳華英) · 최내오미(崔耐㻍美) · 어윤희(魚允姬) · 조철호(趙喆鎬) · 이병욱(李秉旭) · 김종협(金鍾協) · 김준한(金駿漢) · 유청(柳靑) · 김동철(金東轍) · 최익환(崔益煥) · 김정기(金正琪) · 권태석(權泰錫)이며, 상무위원은 권태석 · 최익환 · 김정기 · 김동철 · 명제세 · 송내호 · 서세충 · 신현익 · 유청이었다.
이들 인물 구성을 통해 볼 때, 조선민흥회는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가 그 양대 지주이고, 그 밖에 종교계와 해외에서 귀국한 전투적 민족주의자, 교육계 등의 인사가 개인적으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울청년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은 일부러 여기에 참여시키지 않고, 배후에서 이를 조정하려고 하였다.
조선공산당에서는 처음 조선민흥회를 비중 있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당론으로 결정하고 추진하던 터였으므로 조선민흥회 발기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서울청년회를 분열시켜 점차 조선민흥회를 신간회에 흡수, 합동시키려고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청년회는 1926년 9월부터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었고, 1926년 말에는 조선민흥회의 핵심적 인물이며 서울청년회계인 권태석 · 송내호 등이 조선공산당에 가입, 조선공산당과 조선민흥회는 별개의 조직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조선민흥회는 1927년 2월 11일 발기인 대회를 열고 그 다음날 창립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2월 11일 열린 발기인대회에서 신간회와 합치자는 의견이 만장 일치로 가결되었다. 이에 합동위원으로 최익환 · 이병의(李炳儀) · 민덕(閔德) · 권태석 · 김연중 · 김항규(金恒奎) · 신현익 · 신현구(申鉉九) · 명제세 · 이동식(李東植)을 정하였다.
이들은 발기인대회가 있었던 2월 11일 밤 신간회측 대표 권동진(權東鎭) · 홍명희(洪命熹) · 신석우(申錫雨) 등과 회합하여 합동에 합의하였다. 조선민흥회측은 회원 전원이 무조건 신간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결정은 신간회측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조선민흥회가 신간회에 들어갔다고 하여 서울청년회 역시 조선공산당과 서로 다른 기존의 노선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청년회는 전진회의 검토문 · 사상단체해체반대론에 이어 양당론(兩黨論) · 청산론(淸算論) 등을 통해 그들의 노선을 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