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모자들은 모두 전라도 출신으로 광양의 민회행(閔晦行)·이재문(李在文), 태인의 전찬문(田贊文), 남원의 권학여(權鶴汝), 강진의 강명좌(姜明佐)·김문도(金文道) 등으로 1868년 강진에 모여 거사를 기도한 것으로 봐서, 준비와 계획이 상당히 치밀하였던 것 같다.
1869년 3월 18일 일당 30여 명이 하동 장시(場市)에 모여 상선을 가장한 배에 올라 섬진강을 오르내리며 70여 명을 모아 순천부 하적면 우손도(牛孫島)로 향하였다. 그곳의 유일한 거주자 최영길(崔永吉)의 집에서 소를 잡아 위로한 뒤 갑주(甲胄)와 죽창을 만들고 산제를 올려 난의 성공을 기원하였는데, 주문을 외고 제를 지낸 점이 특징이다.
난민은 우손도를 떠나 광양현 초남포(草南浦)를 거쳐 24일 밤 현성(縣城)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무장한 본군 70여 명과 난의 진행 과정에서 가담한 자들을 모두 합친 3백 명의 난민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 기치를 들고 포를 쏘며 현성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현의 군기고를 습격하여 장수는 갑주를 꺼내 입고 나머지는 궁총을 나눠 들고 동헌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현감 윤영신(尹榮信)을 사로잡고 인부(印符)를 탈취한 뒤 사창(社倉)을 부수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는데, 백성들은 한 명도 살해되지 않았다.
난의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현감 윤영신을 파직하고 영광 군수 남정룡(南廷龍)을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라 병영과 5진영의 군사로 난민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토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난민들로부터 탈출한 윤영신은 칠성면 신기촌(新基村)을 근거지로 이민(吏民) 수천 명을 모아 25일 밤에 현성을 수복하고 난민 수십 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 공으로 더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난을 일으킨 이들의 주장과 목적 그리고 신분을 알려주는 명확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광양의 상황을 보고한 통제사 이현직(李顯稷)의 글에 의하면 주모자들이 모두 잔반(殘班)의 행색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몰락 양반층의 저항이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난이 진압된 뒤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모반 대역죄로 능지처참되었고, 난도(亂徒) 44명은 좌수영(左水營)에서 효수 되었으며 2명은 엄형한 뒤 섬으로 유배되었다. 또, 광양의 읍호(邑號)도 강등되었으며, 변란시 훼손된 민가 25호는 국가가 배상하였다. 이 난은 당시의 민란 중 최초의 병란적 성격을 띠었다.
기정진(奇正鎭)이 쓴 윤영신토평기념비가 광양시 칠성동 수성당(壽星堂) 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