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869년(고종 6) 3월전라남도 광양에서 일어난 민란.
개설
경과와 결과
난민은 우손도를 떠나 광양현 초남포(草南浦)를 거쳐 24일 밤 현성(縣城)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무장한 본군 70여 명과 난의 진행 과정에서 가담한 자들을 모두 합친 3백 명의 난민은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 기치를 들고 포를 쏘며 현성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현의 군기고를 습격하여 장수는 갑주를 꺼내 입고 나머지는 궁총을 나눠 들고 동헌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현감 윤영신(尹榮信)을 사로잡고 인부(印符)를 탈취한 뒤 사창(社倉)을 부수고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는데, 백성들은 한 명도 살해되지 않았다.
난의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현감 윤영신을 파직하고 영광 군수 남정룡(南廷龍)을 안핵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라 병영과 5진영의 군사로 난민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토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난민들로부터 탈출한 윤영신은 칠성면 신기촌(新基村)을 근거지로 이민(吏民) 수천 명을 모아 25일 밤에 현성을 수복하고 난민 수십 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 공으로 더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난을 일으킨 이들의 주장과 목적 그리고 신분을 알려주는 명확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광양의 상황을 보고한 통제사 이현직(李顯稷)의 글에 의하면 주모자들이 모두 잔반(殘班)의 행색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몰락 양반층의 저항이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난이 진압된 뒤 주모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모반 대역죄로 능지처참되었고, 난도(亂徒) 44명은 좌수영(左水營)에서 효수 되었으며 2명은 엄형한 뒤 섬으로 유배되었다. 또, 광양의 읍호(邑號)도 강등되었으며, 변란시 훼손된 민가 25호는 국가가 배상하였다. 이 난은 당시의 민란 중 최초의 병란적 성격을 띠었다.
현황
참고문헌
- 『고종실록(高宗實錄)』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1860년대(年代)의 민란(民亂)에 관한 연구(硏究)」(최진옥, 『전통시대(傳統時代)의 민중운동(民衆運動)』 하, 풀빛사, 1981)
- 「고종조(高宗朝)의 민란연구(民亂硏究)」(박광성, 『인천교육대학논문집(仁川敎育大學論文集)』 14, 1980)
- 「동학란기인(東學亂起因)에 관한 연구(硏究)」(한우근,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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