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산당 자금사건 ( )

근대사
사건
1919년 코민테른의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주의 세력 간의 분규.
이칭
이칭
코민테른자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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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코민테른의 자금 지원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회주의 세력 간의 분규.
역사적 배경

1918년 5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은 이동휘(李東輝)·박애(朴愛)·전일(全一) 등이 중심이 되고 볼셰비키당에서 파견된 원동인민위원회 의장 크라스토체코프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초기의 성격은 민족 해방을 위한 편의적인 공산주의 단체였는데, 1921년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었다.

한편, 1920년 1월 22일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고려부)가 조직되어, 1921년 이 또한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흔히 전자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후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불리는데, 두 당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21년 6월의 자유시참변도 두 당 사이의 군권투쟁의 결과였으며, 이 자금 사건도 이러한 두 당의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경과와 결과

코민테른의 각종 자금 지원 가운데 문제가 된 것은 다음의 과정을 거치면서였다.

이동휘계에서는 1919년 3·1운동이 폭발한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4월 25일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서 대표자대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중앙소비에트정부 및 코민테른과의 관계 정립을 위한 대표단 파견이 결의되어, 박진순(朴鎭淳)·박애·이한영(李漢榮)이 8월 5일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들은 코민테른과 한인사회당은 한국의 해방과 공산주의의 대의를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협정을 맺고, 선전비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 받아 이때의 자금 액수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4백만 루블, 40만 루블, 다액의 선전비 등으로 나타난다.

그들이 자금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나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것은 9월 10일이었다. 그러나 이때 극동의 정세는 많은 변화를 거친 뒤였다. 즉 이동휘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부임하였고, 이에 따라 한인사회당의 중심부도 상해로 옮겨갔으며, 그들의 지원자였던 쿠레코르노프가 백군(白軍)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인 김철훈(金哲勳)·오하묵(吳夏默) 등은 새로 부임한 쉬미아츠키(Shumiatsky)의 지원을 받아 그해 9월 5일전로한인공산당(全露韓人共産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박진순 일행이 도착하자 김철훈 등은 전로한인공산당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그들이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아 온 자금을 탈취하였다(김철훈이 박진순으로부터 자금을 요구하였으나, 탈취하지는 못하였다는 설도 있다).

1919년 11월초, 자금 탈취 사실을 보고 받은 이동휘는 박진순으로 하여금 코민테른에 보내는 탄원서를 가지고 다시 모스크바로 향하도록 하였다. 탄원서는 이르쿠츠크파에 대한 비방,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인사회당의 정부라는 것, 한인사회당은 한국사람들 사이에 공산주의를 전파할 것이라는 것 등이 내용이었다.

박진순은 모스크바에서 도착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고려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제2차 코민테른대회(1920.7.19.∼8.7.)의 ‘민족문제 및 식민지문제 분과위원회’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박진순의 활동 결과, 이동휘는 다시 한형권(韓馨權)을 파견할 수 있었다.

한형권은 레닌(Lenin) 및 외교인민위원 치체린(Chicherin)과 여러 차례 회합하고, 다음의 4가지를 제안하였다. ① 노농노서아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② 한국독립군의 장비를 적위군(赤衛軍)과 같게 해줄 것 ③ 시베리아 일정 장소에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우리 독립군 지휘사관을 양성하게 해줄 것 ④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거액 원조할 것 등이었다.

한형권을 처음부터 호의적으로 맞은 레닌은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는데, 이때 역시 자료에 따라 그 액수가 2백만 루블과 60만 루블로 각각 달리 나타난다. 한형권은 우선 그 가운데 40만 루블을 옴스크로 옮겨 그곳에서 만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에게 맡겼다.

그 후 그가 나머지 돈을 받으러 다시 모스크바로 향했으나, 코민테른에 대한 이르쿠츠크파의 공작에 의하여 나머지 돈 중 20만 루블밖에 더 받지 못한 한형권은 이르쿠츠크파를 피하여 유럽을 경유하여 상해에 도착하였다.

한편, 김립은 우선 20만 루블을 가지고 상해로 들어왔는데, 그는 한형권으로부터 받은 자금 중 일부를 치부와 축첩에 사용했다고 공격을 받았다. 또한, 이동휘계는 이 자금들을 비밀리에 사용했는데, 이것이 한인사회당의 내부분열과 이동휘계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탈퇴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백범일지(白凡逸志)』
『한국공산주의운동사』 Ⅰ(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역, 돌베개, 1986)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서대숙, 현대사연구회 역, 화다, 1985)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 1(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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