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강령은 한국 프롤레타리아와 일본 프롤레타리아의 결합을 굳게 하며, 재일조선인노동자의 단일조합을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그 해 3월부터는 민족의 독립,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을 목적으로, 일본에서 기관지 『척후대(斥候隊)』(월간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부정기 간행물)와 『전진(前進)』을 발행하였다.
1925년 1월 3일 일월회(一月會)로 개칭되었다. 김약수 · 정우영(鄭又影) · 백무(白武) · 김종범 등 북성회의 주류파는 국내에 신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일본 사회주의자들인 효민회(曉民會)의 다카쓰(高津正道),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의 후세(布施辰治), 기타하라(北原龍雄) 등과 함께 1923년 7월말 일시 귀국하였다.
그들은 순회 강연단을 편성하여 7월 30일 서울 종로의 청년회관에서, 8월 1일에는 서울 천도교회관에서 각각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연제는 ‘현 사회의 중병’, ‘해방운동의 의의’, ‘인간생활의 개조와 조선민족의 사명’, ‘청년의 역사적 사명’ 등이었다.
그 뒤 1주일 동안에 걸쳐서 서울 · 평양 · 대구 · 광주 · 마산 · 진주 · 김해 등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북성회의 국내 활동은 서울청년회와 알력이 일어나, 결국 무력충돌한 이른바 낙양관사건(洛陽館事件)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북성회에서는 월례집회를 열었는데 이때 사카이(堺利彦) · 야마가와(山川均) · 아라하타(荒畑寒村) · 곤도(近藤榮藏) · 사노(佐野學) 등 일본 사회주의운동 지도자들이 초빙되었다. 북성회는 그들의 강의를 통해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육성했으며, 한국과 일본 노동운동의 연계를 위해 노력하였다.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때에는 재일본조선노동자조사회 및 동경조선노동동맹회 · 일본노동총동맹과 더불어 이재동포(罹災同胞)의 조사와 위문에 주력하였다. 그 해 11월 동경조선동맹회 · 대판조선노동동맹회(大阪朝鮮勞動同盟會) · 고베조선노동동맹회(神戶朝鮮勞動同盟會) 등과 협의하여 5개항을 결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에 대해 일본정부에 진상발표를 촉구하고 학살에 대한 항의서 제출, 진상규명을 위한 연설회 개최, 격문반포, 피해자 유족의 생활보장을 요구할 것 등이었다.
북성회는 회원 민태흥(閔泰興) · 현칠종(玄七鍾) · 이호(李浩) 등에게 1923년 5월 20일 서울에 한국내 활동의 전진기지로 토요회(土曜會)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인 동년 8월 28일 토요회는 별다른 성과가 없이 해체되자, 그 해 10월 23일 서울에서 김약수 · 김종범 · 마명(馬鳴) · 이헌(李憲) · 김재명(金在明) 등 160여 명이 모여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하였다.
그 뒤 사상 · 청년 · 노동 · 농민운동 등이 점증하자 북성회계의 국내단체를 계통적으로 지휘하기 위한 최고기관 설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1924년 11월 15일 김약수 · 김종범 · 마명 · 정운해(鄭雲海) · 남정철(南廷哲) · 서정희(徐廷禧) · 박창한(朴昌漢) · 박세희(朴世熙) · 신용기(辛容箕, 일명 辛鐵) · 송봉우 · 이호 외 13명의 주동으로 서울에 국내 본부 북풍회(北風會)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건설사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북풍회는 김약수 · 서정희 · 정운해 · 배덕수(裵德秀) · 남정철 · 김종범 · 송봉우 · 박세희 · 김장현 · 신철 · 이이규(李利奎) · 마명 등 12인의 집행위원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1924년 11월 27일 제1회 집행위원회를 열고 서무 · 조직 · 지방 · 조사 · 교양 · 편집의 6부와 1개의 특별연구소를 두기로 결의하고 선언과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강령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시간적 협동’을 기해야 한다고 하여, 민족해방을 위한 민족협동전선의 조직을 추구하였다.
일본에 남아 있던 북성회원들은 1925년 1월 3일 새로운 대중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위해 더욱 확대, 강화된 조직체를 가지기 위해 북성회를 해산하고 일월회를 조직하였다.
북성회는 일본에 있어서 한국노동자들의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북풍회를 통해 한국의 초기 사회주의운동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북풍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