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봉우(宋奉瑀)는 1900년(고종 37)에 태어나 유년시절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하였다. 경성기독교청년회에서 1년 동안 영어를 학습하였다. 일본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22년 4월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를 다니며 법률학, 경제학 등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 군관학교 학생 파견사건 등과 관련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20년 1월 조선인고학생동우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7~8월에 걸쳐 조선학생대회 주최의 각지 순회대강연에 연사로 참석하였다. 1921년 5월 28일 조선학생대회 주최로 남녀 연합 토론과 강연회에서 ‘통일관(統一觀)’이라는 주제로, 같은 해 6월 18일 ‘조선학생의 견지로부터 본 우리 사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2년 일본노동총동맹(日本勞動總同盟) 주최의 메이데이 행사에서 흑도회(黑濤會) 간부로 참가하여 백무(白武)와 함께 연설하여 청중의 호응을 얻었다. 1922년 12월 1일 송장복(宋章福), 최태열(崔泰烈) 등과 함께 오사카〔大阪〕조선노동자동맹회를 설립하여 사회위원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경찰에 해산당하고 송장복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922년 말 김약수(金若水) · 김종범(金鍾範) 등고 함께 흑도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성회(北星會) 조직에 참여하여 1923년 1월 집행위원이 되었고, 3월에는 북성회 기관지로서 민족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을 목적으로 『척후대(斥候隊)』의 주간으로 편집을 맡았다. 같은 해 8월에는 북성회 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국내로 들어와 각지에서 강연을 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 신흥청년동맹이 주최한 ‘청년문제 대강연’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1923년 10월 북성회, 노동연맹, 서울청년회, 노동공제회와 주의 선전비와 관련하여 배덕수(裴德秀), 김약수 등과 반대 측 박이규(朴珥圭) 일파에게 폭행 상해를 가해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불기소되었다.
1924년 2월 새로 조직된 경성신흥청년동맹의 강연회에서 연사로 강연하였고, 같은 해 4월 23일에는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총회에 재일본무산청년회 대표로 참석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 북풍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2월에는 경성청년회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렇듯 지속적으로 각종 강연회에 참여하여 노동문제와 사회주의를 주제로 하여 강연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1925년 1월 16일 밤 해주청년회에서 강연하여 중지 명령을 받았고, 같은 해 3월 20일 함흥 동명극장에서 강연 중 경찰에 상해를 입혀 중지 명령을 받았다.
1925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기자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도 참석하여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1월 당내에서 북풍회의 종파 활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정권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26년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허정숙(許貞淑)과 동거설로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1927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이듬해 2월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1929년 4월 24일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1년 5월 1일부터 발간된 잡지 『 비판』 발행을 주관하여 당시 『 조선일보』 조사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북성회 출신 이여성(李如星)의 도움을 받아 잡지를 간행하였다. 이후 일제가 『비판』을 강제 정간(停刊)하는 1940년까지 발간하였다.
1931년 3월 『개벽』, 『동광』, 『삼천리』 등 13개 잡지사 대표가 모여 조직한 서울잡지협회에 참여하여 검열제와 출판 법규, 신문지법에 대비하여 언론 자유 등에 관심을 기울였다. 같은 해 5월 3일 '메이데이 격문사건'으로 『비판』 지 기자 박일형(朴日馨), 조경서(曺景敍) 등과 체포되기도 하였다. 1934년 7월에는 ‘군관학교 학생파견사건’에 연루되어 한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8 · 15광복 이후에는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문제에 관심을 두고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여 1924년 2월 경성신흥청년동맹의 강연회에서 ‘청년운동의 사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고, 같은 해 6월과 7월에는 『척후대』에 각각 「조선 무산청년운동의 방향 전환을 논함」, 「연령제한론-25세를 주창」을 기고하였다.
1925년 1월 16일 밤 해주청년회에서 ‘힘의 투쟁과 힘의 집중’이라는 제목으로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에 노력하여 무산자는 세계적으로 대동단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의 강연을 하였고, 같은 해 3월 20일 함흥 동명극장에서 ‘움직이는 세계와 조선 청년의 사명’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1931년 잡지 『비판』 발행을 발행하여, 그 목적으로 "정치, 시사, 경제, 사회, 사상문제를 비판할뿐더러 세계 각 약소민족의 운동과 국내의 각 운동정세를 보도하며 현 사회의 암흑면을 폭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