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 결성된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 초대위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결성대회는 1922년 12월 1일, 기타구(北區) 죠우(九條)시민회관에서 조선인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1923년 전반에는 총동맹이 주최한 각종 운동에 응원 변사(辯士)로 참가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학살과 관련하여 조선인 구제 활동을 전개했으나, 충분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특히 쵸도(城東)노동동맹회 조직화에 직접 관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내용도 확인된다.
1925년 2월 도쿄와 오사카의 조선노동동맹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인 노동단체를 규합하여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조직되었는데, 오사카의 단체들이 일치해서 오사카연합회를 만들 때 설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조직 이후에도 ‘아나르코생디칼리슴, 무정부주의파’인 어파(魚波)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자신의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1926년 5월 병에 걸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오사카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장을 사임했다. 같은 해 12월 쇼와(昭和)천황 즉위식을 맞아 검속되었다.
1929년 4월의 오사카조선노동조합 제3회 대회 때에는 서부지부 위원으로 정치부를 담당, 대동소비조합의 운영에도 관여했다. 신간회 오사카지회 간부로 활동도 병행했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젠쿄(全協)로 합동 해소할 때 어떤 태도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1931년 8월에 오사카조선무산진료소의 주도권을 합법무산정당계로부터 ‘볼셰비키파’ 조선인이 빼앗은 대회에서 검사위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