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6일 결성된 재일조선인의 청년조직으로 재일조선인연맹의 지도 아래 출범했다. ‘민청’이라고 약칭했다.
민청은 선언에서 재일조선인의 생활권 옹호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얘기하고, 그 방법으로 민족의 정당한 권익과 자유를 유린하는 일본반동세력의 타도와 민주인민정권의 수립에 있다고 한다. 아울러 강령에서는 조선 민족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정치, 경제, 문화 등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이익과 해방을 유린하는 모든 반동세력과 철저한 투쟁을 역설했다. 아울러 청년운동의 통일, 청년의 체육, 교양, 훈련, 소년지도, 생활권 옹호, 임시정부 수립 촉진 등을 기본방침으로 했다.
해방 직후에 결성된 ‘조선청년자위대’가 1946년 4월 미군에 의해 해산된 이후 재일조선인연맹이 독자적인 청년조직 결성을 모색하여, 같은해 9월 시즈오카현(靜岡縣)에서 본부를 조직했다. 계속 해서 가나가와(神奈川), 도쿄(東京) 등 일본 전국 13개 도·현에서 하부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를 기초로 하여 민청 중앙 결성 중앙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위원장은 윤봉구가 맡았으며, 부위원장은 이응복(과) 정일, 중앙위원으로 79명을 선정했고, 재정감사 3명을 두고, 예산 2,532,150원을 통과시켰다.
1947년 2월 15일 제2회 중앙 결성준비위원회가 소집되고 결성대회에 이르게 되었다. 1947년 3월 6일 재일본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대회가 교바시공회당(京橋公會堂)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226명의 대의원이 소집되어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선언, 강령, 행동준칙이 채택되었다.
1947년 10월 홋카이도(北海道), 아오모리(靑森), 사가(佐賀), 미야자키(宮崎)의 4개의 현을 제외하는 지방조직을 결성했다. 구성원 7만 명, 연령은 18세부터 27세를 대상으로 했다.
1948년 10월에는 본부 47, 지부 522, 분회 424, 반 2587개소이다. 1949년 6월 현재 지방본부 48곳, 회원 10만 명을 보유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9년 9월 ‘단체 등 규정령’의 적용을 받아 재일조선인연맹과 함께 해산 당했다. 조직적으로는 재일조선인연맹 산하 조직이지만 독자성을 유지했고, 재일조선인연맹의 노선·방침을 실천하는 행동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민청의 주요 정치 활동은 일본 총선거에서 일본공산당 후보를 지원, 참정권 획득 운동, 본국의 임시정부 수립 촉진, 예능제와 민족문화교류회, 외국인등록령 반대 투쟁, 생활협동조합운동, 민단·건청 등과의 투쟁 등을 전개했다.